나주, 곰탕특화거리·600년 전통 영산포 홍어특화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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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곰탕특화거리·600년 전통 영산포 홍어특화거리
  • 취재·사진=한기원·김경미 기자
  • 승인 2023.10.2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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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원도심 활성화, 특화거리에서 답을 찾다 〈7〉
나주시 한복판 금성관길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나주곰탕거리.
나주시 한복판 금성관길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나주곰탕거리.

나주평야와 해산물 집산지인 영산포를 아우르고 있는 곳
 나주곰탕, 영산포홍어, 장어 지역 대표음식 ‘사람들 몰려’
나주곰탕 맛 잇는 하얀집·삼대나주곰탕·노안집 등 유명해
천년 역사를 간직한 나주 원도심, 역사문화유산 등 즐비


천년 역사문화도시인 전남 나주는 고려 시대부터 전북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의 행정과 경제·군사·문화의 중심지였다. 983년 고려 성종 때 설치한 나주목은 913년 동안 유지됐고, 곡창지대를 끼고 농축업이 발달해 당시 인구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혔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나주에 가서 세금 자랑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조정에 올려보냈을 만큼 부유한 고을이었다. 드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생산된 넉넉한 농축산물과 전국 유일의 내륙 항구인 영산포 뱃길을 따라 유입된 각종 해산물이 더해지면서 전국 최초의 장시(5일장)가 열릴 만큼 각종 산물도 풍부했던 곳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고장이었던 나주에서 시작된 맑은 곰탕의 유래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한반도를 침탈한 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나주 등지에 비옥한 농지가 많아 경작용 일 소로 쓰기 위해 키우는 소 마릿수가 많은데 주목하고, 1916년 현재의 나주시 죽림동 일대에 일본인 사업가 ‘다케나카 신타로(竹中新太郎)’를 앞세워 당시 최신 설비를 갖춘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을 세운다. 이 공장은 전쟁터에 나간 일본군에게 군납용으로 보급할 쇠고기통조림을 주로 만들었다. 통조림용 소는 당시 나주시 금성동 일대 잿등에 있던 도축장에서 도살해 공급했다.

나주를 비롯해 인근 함평, 영암 등지에서 트럭에 실려 온 소를 하루 200~300여 마리를 도축했고, 작업에는 조선인 인부들이 대거 투입됐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는 하루에 400여 마리가 넘는 소가 도살되면서 도축장에서 현재 송월동의 나주초등학교 후문을 따라 흐르던 재신천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인 ‘다케나카 통조림공장’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목재 건물 옆에 가축(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 사업가가 건립한 ‘축혼비(畜魂碑)’가 아직도 서 있다. 일제가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의 한우를 매일 같이 도축했는지 보여주는 수탈의 상징물이다.

나주는 곡창인 나주평야와 해산물 집산지인 영산포를 아우르고 있는 곳이다. 쌀과 가축·생선이 풍부하니 미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나주에는 음식거리가 여러 곳 조성돼 있다. 외지에도 잘 알려진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장어가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들인데, 이들은 시내에 제각각 먹자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나주에 머물면 입이 즐거운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는 말도 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나주를 찾아 끼니마다 다른 맛을 보며, 천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나주 원도심의 거리를 둘러보는 일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 맑고 진한 국물 맛, 나주곰탕 특화거리
일제는 통조림 제조과정에서 사용하지 않고 버려지다시피 한 소머리와 각종 부산물 등의 부위를 조선인 상인들에게 헐값에 넘겼다. 당시 상인들은 시장 저잣거리에 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워서 소머리와 각종 부산물에서 떼어낸 살코기 등을 넣고 끓인 국밥 형태의 곰탕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고급 부위는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차지한 탓에 부산물만 넣고 끓인 곰국은 수차례 기름기를 걷어내는 수고를 거쳐야만 맑고 개운한 맛의 국물을 얻을 수 있었다. 나주 사람들은 당시 시장에서 팔았던 맑은 국물의 국밥이 나주곰탕의 시초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세월이 흘러 현재 나주시 과원동 금성관(錦城館·조선시대 관아) 앞에 들어선 나주 곰탕집 거리에서 즐길 수 있는 곰탕은 주로 소의 사태·목심·양지 등의 살코기 만 넣고 6시간 이상 푹 고아 국물이 맑고 담백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 나주곰탕은 이미 전국구 음식이 된 지 오래다. 서울을 비롯한 웬만한 대도시의 거리를 오가다 보면 ‘나주곰탕’이라는 간판을 단 식당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다.

나주곰탕은 조선 시대 때 처음 등장한, 나주오일장과 호남에 바람을 일으킨 프리미엄 곰탕이다. 이전에는 주로 해장국, 순대국 등 부속 탕국 일색이었는데, 이후 고기를 듬뿍 넣어주고 지단까지 올린 나주곰탕이 큰 인기를 끌었다. 브랜드가 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고, 조선 시대 때 관아였던 금성관 주변은 ‘나주곰탕특화거리’로 조성돼 전국의 미식가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지금은 설렁탕에 못지않은 맛과 식감을 자랑하는 곰탕이지만 그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나주 영산포는 호남의 질 좋은 농수축산물을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포구였다. 나주에서는 쌀과 함께 일대에서 생산된 쇠고기도 함께 보냈는데 질 좋은 고기와 뼈는 발라서 한양으로 보내고 남은 부위를 삶아 국을 끓인 데서 시작됐다. 나주곰탕 역시 뼈를 고았을 때는 뽀얀 국물이 우러나는데 사골 등에 비해 안 좋은 부위를 사용하기 때문에 진국을 내려면 오래 삶아야 했다.

그런데 고기 삶은 물을 버리자니 아까워서 뼈 삶은 국물에 섞어 보았더니 뽀얀 뼛국물의 색깔이 사라지고 맑은 국물로 변했고, 맛도 훨씬 좋아졌다. 이렇게 만든 맑은 장국은 고소하면서도 맛이 있었다. 여기에 잡내를 없애기 위해 마늘·생강 등을 넣고 끓여 완성한 것이 바로 ‘나주곰탕’이다. 나주곰탕은 양지나 사태 등 고기를 삶아 육수를 내기 때문에 맛이 개운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여기에 무·파·마늘을 많이 넣기 때문에 누린 내가 없고 무기질도 풍부하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밥을 말아 계란지단과 대파를 올리고 푸짐하게 쌓인 머릿고기와 양지의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나주곰탕은 경상도식 따로국밥처럼 밥을 따로 내지 않는다. 나주의 모든 곰탕집들마다 한결같이 삶은 고기는 먼저 건져서 먹기 좋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둔다. 그리고 뚝배기에 고기와 밥을 넣고 뜨거운 국물로 수차례 토렴을 한 뒤 먹기 딱 좋은 온도인 75도 정도에 이르면 계란지단과 송송 썬 파 등의 고명과 함께 얹어 손님에 올리는 것이 특징적이다.

나주 원도심의 곰탕특화거리에는 10여 곳이 넘는 ‘나주곰탕집’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대를 이으며 나주곰탕 맛을 잇고 있는 하얀집과 삼대나주곰탕원조집, 노안집 등이 유명하다.
 

나주영산포홍어거리.
나주영산포홍어거리.

■ 600년 전통의 나주 영산포 홍어특화거리
나주곰탕과 함께 나주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영산포 홍어는 양대 식단이다. 영산포의 삭힌 홍어가 유명해진 것은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영산강을 따라 올라오는 도중 자연 발효돼 톡 쏘는 암모니아 맛이 나게 됐고 그 맛이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면서부터다.

영산포 숙성 홍어는 600년의 오랜 전통과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시대 정약전(1758∼1816)이 흑산도 유배생활 중 집필한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는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하는데, 지방에 따라 기호가 다르다’고 하면서 나주인들과 숙성 홍어의 긴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 중종 25년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고려말 남해안 지역 왜구의 노략질로 흑산도 인근 영산도 사람들이 영산포로 피난을 오게 됐고 그때부터 이 지역에서 삭힌 홍어를 먹게 됐다고 전해져 온다. 당시 영산도에서 영산포까지 오는 데는 뱃길로 보름 정도 걸렸다. 도착하고 보니 배에 싣고 온 생선들이 부패가 심해 버렸는데 유독 항아리 속에서 폭 삭은 홍어만큼은 먹어도 뒤탈이 없었다. 그런데다 먹을수록 알싸한 풍미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1970년대 영산강 하굿둑 공사로 바다 물길이 막히기 전까지 흑산도, 대청도 근해에서 잡힌 홍어의 내륙 종착점은 영산포구였다.

‘전라남도에서는 결혼식·회갑·초상 등 집안 경조사에 홍어가 없으면 잔치로 치지 않을 정도’로 필수적인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제는 외지 사람들도 그 맛에 빠져들고 있는데 전 프랑스대사의 부인도 삭힌 홍어 마니아라는 기사가 나면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현재 영산포 선창가 일대에는 홍어 전문점 30여 곳이 성업 중이며 택배와 포장판매 전문점까지 합치면 50여 곳을 웃돈다고 한다. 삼합을 만드는 홍어의 원산지는 아르헨티나·알래스카·칠레·흑산도산 등인데 초기에는 칠레산 홍어가 많았지만 요즘은 아르헨티나와 알래스카산이 더 많아졌다는 반응이다.

남도 잔칫상을 대표하는 ‘숙성 홍어’ 본고장인 나주 ‘영산포 홍어거리’가 다시 찾고 싶은 명품 음식특화거리로 단장한다. 전라남도에서 공모한 ‘2023년 남도음식거리 조성사업’ 대상지로 영산포 홍어거리가 최종 선정됐기 때문이다. ‘맛의 고장 남도, 다시 찾는 영산포 홍어’를 비전으로 쾌적한 거리 조성, 특화 콘텐츠 설치, 친절 문화 구축 등 핵심과제별 세부 사업 추진을 통해 남도 음식거리로 탈바꿈할 ‘영산포 홍어특화거리’는 영산포 등대·일본인지주가옥 등 영산포 근대문화유산, 영산강 자전거길·황포돛배와 같은 관광자원과 연계해 먹거리뿐만 아니라 볼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한 영산포 상권 활성화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600년 전통의 영산포 홍어만이 가진 ‘삭힘의 미학’을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 거리로 승화시키기 위한 ‘제19회 영산포 홍어축제’가 지난 5월 5일부터 7일까지 영산포 홍어의 거리 일원에서 코로나19로 인해 3년여 만에 열렸다.
 

나주영산포홍어거리 조형물.
나주영산포홍어거리 조형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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