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 정인홍 의병 5000명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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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 정인홍 의병 5000명 봉기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11.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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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14〉
경남 합천군 대병면 합천호수로에 위치한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유물관) 전경.
경남 합천군 대병면 합천호수로에 위치한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유물관) 전경.

이름 없는 민중들 삽·곡괭이 들고 일본 조총에 맞섰던 의병 추모공간
임진왜란·병자호란 왜적과 맞서 국난극복한 합천선민들 충혼 모신 곳
대표적인 의병장 내암 정인홍, 1536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서 출생
인조반정 이후 의병 활동 역사 왜곡, 합천 의병의 역사를 재정립해야

 

일반적으로 창의(倡義)란 국란을 당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의병은 옳은 일을 위해 일어난 군사로, 평소 훈련된 상비군인 관군이 아닌 비정규군인 ‘민병(民兵)’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의병 활동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와 구한말 1894년 갑오경쟁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돼 을사조약, 고종퇴위와 1907년 군대해산 때까지 활약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은 전국적으로 2만 3000여 명이나 됐으며,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영남에 곽재우, 정인홍, 호남에 고경명, 김천일, 호서에 조헌, 승병(僧兵)인 휴정과 유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의병의 효시(嚆矢)는 소위 영남 3대 의병장이라 불리는 정인홍, 곽재우, 김면(金沔) 등 서부 영남의 남명(南冥)의 문인집단이었으며, 그 가운데 곽재우가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부 영남의 정인홍, 곽재우, 김면, 박성, 오운, 조종도, 박사재, 이노 등 남명 문하생들이 1만 명 이상이 규합해 대대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합천, 초계, 삼가, 고령, 성주 일대를 장악한 정인홍이 의령·현풍지역의 곽재우와 거창방면 김면과 손을 잡고, 경상우도 의병 활동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경남 합천군 대병면 합천호수로 258-1에 있는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는 의로움을 크게 드러낸 의병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라고 전한다. 우리는 의병들의 후예일까. 농기구를 들고 맞선 의병의 모습을 보면서 의병 후손으로서의 긍지일까. 아니면 오만일까. 임진왜란의 발발과 의병의 발상지 합천, 항일의병의 활약, 합천 의병의 맥 등을 살피고 나서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 문밖으로 나오면서 이름 없는 민중들이 삽과 곡괭이 들고 일본의 조총에 맞섰던 의병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되짚어 본다.
 

위패가 봉안돼있는 창의사(사당).
위패가 봉안돼있는 창의사(사당).

■ 합천 선민들의 충혼의 혼백을 모신 곳
경남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가 의병 활동의 업적과 선현들의 숭고한 정신 등을 배우는 산 역사교육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합천임란기념관, 창의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왜적과 맞서 싸워 국난을 극복한 합천 선민들의 충혼의 혼백을 모신 곳이다.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彰義祠)’는 임진왜란 때의 합천지역 의병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의병장 정인홍 등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2001년에 건립했다. 합천임란창의기념관은 임진왜란 때 합천지역 (당시 합천, 초계, 삼가)을 중심으로 창의한 선열들의 고귀한 호국 희생정신을 추모 선양하고 계승발전 시키기 위해 세워졌다. 합천군이 지난 1992년 3월 옛 문화원에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기념관건립대책연석회의를 거쳐 1994년 1월에 경남도지사로부터 기념관 부지를 공공용지로 사용승인을 취득했다. 같은 해 11월 5일 기공식을 하고, 8년 만인 2001년 5월 10일 준공식을 갖고 개관했다. 이곳에는 사당인 창의사(彰義祠)와 유물관(遺物館), 강당인 경의당(敬義堂) 등이 있다. ‘합천임란창의기념탑’에는 세 모서리에 죽창, 괭이, 삽, 쇠스랑 등을 든 농민 의병의 조각상이 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우리 선조들은 붓과 호미를 던지고 분연히 일어났다. 특히 합천이 고향인 정인홍 의병장을 중심으로 의병 5000여 명이 봉기해 초계, 현풍 등 낙동강 일대에서 왜군과 맞섰다. 이들은 고령, 성주, 진주, 금산 등지로 진출해 내륙 깊숙이 북상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또한 호남 의병과 협동해 적을 물리치는 등 전국 의병궐기의 효시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 창의가 전무한 가운데 유일하게 합천에서 의병이 창의했다. ‘합천 의병’들은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는 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합천군은 왜적을 격퇴했던 의병장 정인홍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을 추모하기 위해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를 건립하기로 했으며, 건립기금은 숭고한 선열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도 동참해 성금 3억 5000만 원을 모았다고 한다. 합천군은 주민 성금 등 총 61억 원을 투입해 지난 2001년 5월 10일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를 건립·개관했다. ‘합천임란창의기념관, 창의사’는 합천 대병면 합천호 옆 산비탈 3만 4048㎡의 면적에 준공하고 사당에는 121명의 위패를 모셨다. 또한 의병의 활동 업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관과 교육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경의당 등도 갖췄다. 특히 1999년에는 높이 17m, 폭 19.6m로 건물 8층 높이와 비등할 정도로 웅장하게 ‘임란창의기념탑’도 세웠다. 
 

의병의 업적을 전시한 유물관 내부.
의병의 업적을 전시한 유물관 내부.

■ 경남 ‘합천은 의병의 발상지’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은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민족은 타국에 대한 투쟁 속에서 강한 국민성을 갖게 됐으며, 특히 조선 시대 의병 활동은 항일독립운동의 모태가 됐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때이다. 

대표적인 의병장인 내암 정인홍은 1536년 합천군 가야면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기품이 뛰어나 서봉(瑞鳳)으로 불렀으며, 15세 때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수문고제(首門高弟)가 됐다. 조식의 보물인 ‘경의검’을 물려받을 정도로 믿음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23세에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38세에 황간 현감으로 제수되고, 45세에 사헌부 장령으로 출사했으나 회의를 느껴 귀향해 부음정(孚飮亭)을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정인홍이 57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소 부음정에서 양성하던 문인집단을 중심으로 흩어진 관군, 토호들의 노비를 모아 의병을 조직했다. 5월 10일에 3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곽재우, 김면 등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무계(茂溪)전투, 초계전투, 안언역(安彦驛)의 대승, 단성에서 호남의병 최경회군 지원, 진주성 부원(赴援)작전, 성주성 탈환 작전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낙동강 일대에서 연합전선을 만들어 왜적의 진로를 막았으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뿐만 아니라 호남의 곡창지대를 수호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정인홍은 60의   고령에 외아들까지 잃으며 국난극복의 일념으로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창의 모병으로 특별수훈자로 평가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에 형조판서, 승정원 부승지 등에 전수됐으나 사양하고 사헌부 대사헌에 잠시 부임한 후 낙향했다. 광해군 때 78세에 우의정, 80세에 좌의정에 제수됐으나 사직해 산림정승(山林政丞)으로 불렸다. 83세에 영의정에 제수됐으나 88세 때 인조반정 폐모론 주동자로 몰려 처형됐으며, 1908년 순종칙명으로 영의정에 복위됐다. 

일본학자 다카이 마사유끼(貴井正之)가 ‘정인홍 의병 활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우리 학계에서 ‘창의 활동과 사회개혁론’ 등 정치적·사상적 혁신을 통한 역사 연구에 재조명되고 있다.
선조 25년 4월 14일 섬나라 왜국(일본)에서 이 나라 조선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정발 장군의 죽음으로 부산이 함락되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 국토는 일본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7년 뒤인 선조 31년 11월 18일 노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난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한때는 ‘7년 전쟁’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사적 용어로는 임진왜란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왜국(일본)의 분탕질에 그치고 말았는가. 우리 조선은 물론 명나라까지 개입한 국제적인 전쟁이 아니었던가. 임진왜란은 분명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이름은 ‘조일전쟁(朝日戰爭)’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조일전쟁(朝日戰爭) 말이다.

이 나라 조선이 과연 자기 영역을 지켜낼 힘을 가진 나라였는지, 군인이란 사람들이 왜군의 조총 소리에 놀라 삼십육계 줄행랑치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이 나라의 군인이 더러운 목숨을 연명하려고 도망간 자리에 죽창을 들고, 밭갈이를 하던 괭이를 들고, 거름을 뒤집던 쇠스랑을 들고, 왜군의 조총에 맞섰으니 그들의 이름은 ‘의병’이었다. 의병, 그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는 지켜진 것이 아닐까. 당시 조정에서 이 나라의 농민과 서민을 위해 해준 것이 무엇이었던가. 사대부들이 백정으로 이름 지어 차별하고, 상놈으로 능욕했건만 그들은 자기를 무시하고 못살게 군 이 나라의 조정을 지키려고 일어섰더란 말인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더란 말인가.

‘합천은 의병의 발상지’다. 국록(國祿; 나라에서 일한 대가로 관료에게 주는 돈)이라고는 반 푼어치도 입에 넣지 않은 합천 삼가 출신의 남명 조식 문하의 선비들이 민중과 함께 일어섰으니, 그것이 ‘의(義)’의 시작이다. 내암 정인홍과 망우당 곽재우 장군으로 대표하는 의병 활동,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의병 활동에 대한 역사는 왜곡되고 말았다. 역적으로 내몰린 정인홍은 의병의 이름에서 지워지고, 조식의 사적은 불태워진 것이다. 

경남 합천군 대병면 성리 합천호반에 세워진 ‘합천임란창의기념관’은 조일전쟁(朝日戰爭) 당시 효시가 된 ‘합천 의병’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이름 없이 산화해간 의병들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추모공간이다. 당시 의병 활동과 관련된 유물들을 한곳에 모아서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만들었다는데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기념타ㅂ
농민 의병 조각상이 있는 창의사 기념탑.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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