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75-누가 쓸모를 결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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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75-누가 쓸모를 결정하는가
  • 장정우 <공익법률센터 농본 활동가>
  • 승인 2024.05.02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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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랜 75>는 근미래의 사회를 그린다. ‘플랜 75’는 증가하는 노인 혐오 범죄와 심각해지는 고령화에 대한 대응책으로써 일본 정부가 75세 이상 고령자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원하는 제도다. 얼핏 ‘플랜 75’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도 이 제도를 두고 ‘미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노인들이 나이 들어서도 일하는 게 불쌍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선택할 수 없으니, 죽을 때만큼은 어떻게 죽을지 직접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한 꺼풀 더 들여다보면, ‘플랜 75’는 삶을 선택할 ‘권리’ 같은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고객의 희망에 따라 정부가 지원하는 이 시스템은, 신청자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중단 가능하지만 일자리도, 집도, 가족도 없는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린 이들만 ‘플랜 75’를 신청하게 된다. 정부 또한 좋아서 죽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회, 15분으로 제한된 전화 상담을 통해 신청자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케어’한다.
 

플랜 75/감독 하야카와 치에/드라마/일본/2024

SF로 분류된 영화이지만, 판타지로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지난 4월 15일 <농민신문>에는 역대 충남도지사 중 농업농촌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평가받는 김태흠 지사의 인터뷰(“농민도 ‘정년’ 필요…‘돈 되는 농업’ 전환해 청년 유입”)가 실렸다. 인터뷰에서 김 지사는 농민의 세대교체를 이야기하며 농민 정년제를 언급했다. 고령 농민들이 은퇴해 여행도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고 노후도 즐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만 숨겨진 요지는 따로 있다. 고령 농민들이 경작하는 농지를 앞으로 유입될 청년농에게 몰아주고 그들에게 농업도 돈이 된다고 어필하려는 것이다.

노후를 즐기는 은퇴 농민의 삶을 상상하며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쓸모’가 없어진 농민을 짐으로 생각하는 미래가 그려져 마음이 착잡했다.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어진 노인에게 우리 사회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라는 포장을 씌워서 또 다른 ‘플랜 75’를 제안하지 않을 것인가. 

올해 우리나라 농민의 수가 200만 명 밑으로 떨어진다는 기사가 났다. 해당 기사에서는 65세 이상의 고령 농민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농민의 고령화는 심각한 문제이며 실재한다. 하지만 고령 농민을 젊은 농민으로 대체하는 식의 접근은 실로 단순한 생각이다.

독립을 한 후 몇 년 동안 할머니와 이웃하여 산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느 때보다 할머니의 능력을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름 모를 풀이 할머니를 통해 나물이 되었다. 할머니가 타지로 이사하신 후 돌나물, 화살나무잎 등 철마다 만나던 나물들은 다시 아무 이름 없는 풀과 나무가 됐다. 우리 사회의 고령 농민들 그리고 농민으로 규정되지 않은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들로 나섰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저마다의 텃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린다.

영화에서는 75세 이상 노인, 우리 사회에서는 70대 고령 농민이지만 다음에는 누가 국가로부터 쓸모없는 존재로 지목될지 모른다. 지금 국가가 해야 할 일은 한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누군가를 쓸모없다고 낙인찍고, 낙인찍힌 존재를 매끈하게 사회에서 퇴장시킬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사람이 집에서, 마을에서, 사회에서 나이에 맞게 저마다의 색깔에 맞게 존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나는 이것이 국가의 ‘쓸모’라고 생각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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