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의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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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의 진면목
  • 이원기 칼럼위원
  • 승인 2018.06.2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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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가 최근에 펴낸 단행본 ‘추사 김정희’는 여러모로 흥미진진했다. 그가 10여년 전에 쓴 ‘완당평전’에는 실려있지 않은 추사의 글씨들이 새롭게 소개된 것도 굉장한 볼거리였지만, 72년의 긴 삶을 추적하며 추사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알 수 있게 한 점이 특히나 마음에 와 닿았다.

1786년, 정조 10년에 태어난 추사는 삼한 갑족의 후예라 할만큼 뼈대있는 집안 출신이다.
경주 김씨 신라 왕족의 피가 흐르는 그의 집안은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낸 바 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혼인해 월성위에 봉해졌으며 부친 김노경도 평안감사 판서벼슬에 올랐다. 추사 자신은 북학파 박제가의 제자에, 다산을 전승했던 학자요, 중국 청나라 고증학과 금석학의 태두였던 옹방강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아 조선의 금석학과 고증학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북한산의 이름모를 옛 비석이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도 추사였다. 어디 그뿐이랴! 젊은 나이에 주역에 통달했던 아암 혜장 스님과 다도에 일가를 이뤘던 초의 선사, 문사로는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운석, 조인영, 황산 김유근 등이 추사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당대의 손꼽히는 역관들이었던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 등이 추사를 흠모하며 따랐던 중인 계열 재사들이었다.

그 위에 매화 그림으로 일가를 이룬 우봉 조희룡, 산수화의 대가 소치 허련, 고람 전기 등이 추사의 은의를 입은 화가들이었다. 잘 쳤던 흥선대원군 이하응 역시 추사에게 난을 배웠던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니, 여러 계층의 인재들과 두루 친교한 추사야말로 19세기 초·중반을 예술과 학문으로 쥐락펴락한 일세의 인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만사 새옹지마요, 흥진비래 고진감래 하지 않던가! 추사를 서화의 진정한 대가로 키운 것은 뜻밖의 시련들이었다.

두 번에 걸친 유배생활을 비롯한 갖가지 시련은 어찌보면 추사 자신이 빌미를 제공한 탓도 있었다. 추사가 41세 때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비인헌감 김우명의 비리를 고발해 봉고파직시킨 일이 결국 그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가 된 것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고결한 성품이 결국은 집안의 화근이 됐고, 하마터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뻔 했던 그를 구원해준 사람은 당대 최고의 척신이었던 우의정 조인영이었다.

또 한가지 젊은 날의 추사는 창암 이삼만이나, 원교 이광사 같은 당대 최상급 명필들의 글씨를 가차없이 깎아내려 상대방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척을 진다는 것이야말로 송사와 더불어 가능한 하지 말아야 될 일 이다. 또한 사람이 살다보면 참아야 할 때 참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게 마련이리라. 필자는 추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좇으며, 문득 점필재 김종직이 서자 출신 간신배 유자광의 현판글씨를 보고 분개하여 떼어내려 부숴버린 사실이 떠올랐다.

그 일 하나가 결국 김종직이 세조가 조카 단종을 내쫓아 죽인 사실과 빗대어 쓴 ‘조의제문’과 연관되어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 일동이 김종직 이하 사림파를 도륙해버린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추사는 다행히도 살아생전 초의 선사에게 창암 이삼만의 현판을 떼어버리라고 하였던 것을 제주 유배가 풀려 돌아오는 길에 다시 걸도록 했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과격했음을 뒤늦게 후회하고,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 같은 서도의 대가도 각기 그들만의 범접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흔쾌히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야 말로 추사를 해동제일의 서화가로 만든 비결임을 깨닫고 그의 글씨와 그림을 보니 가히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으로 보는 글씨요 그림이었으나, 살아 움직이며 광채가 나는 느낌이었다.

이원기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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