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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名妓) 이매창

가는 길에 배 밭을 볼 수 있을까? 원, 걱정도 팔자지. 자동차로 두 시간 가까이 달리는 동안 배 밭 하나 못 만나랴!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으로 시작되는 이매창 (李梅窓, 1573-1610)의 걸작 시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때도 철모를 나이에 ‘와! 시 좋다!’하며 하이얀 배꽃이 비처럼 난분분하는 정경을 떠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세월이 흘러도 배꽃이 피는 계절이면 절절한 사랑과 애끓는 이별을 거문고에 실어 노래인지 울음인지 모를 심정을 토로하는 이매창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아! 드디어 이매창의 시비와 무덤이 있는 부안으로 가보는 것이다. 벅찬 가슴을 진정하며 창밖을 보니 차는 광천을 지나 서해고속도로로 접어든다. 그리운 연인을 만나러 간들 이보다 더 설렐 수 있으랴! 본 적 조차 없는 여인. 향금, 계생, 계량, 그리고 매창이라는, 동인이명(同人異名) 위에 내가 정을 줬던 여인들의 모습을 차례로 얹어본다. 그리고 아직은 그녀들이 지상에 함께 남아있음을 감사하며 나의 못다 한 사랑을 전하기라도 하듯 나직이 노래 부른다. 곡조도 모른 채 노래하는 것이다.

이화우 흩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천리 먼 길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38세의 한창 나이에 폐결핵으로 붉은 피를 토해내다가 어느 집 툇마루에선가 쓸쓸히 죽어갔다는 매창의 최후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린다. 살아생전 그녀의 뛰어난 한시(漢詩)며 청아한 목소리, 거문고 술대 위에서 영혼이 뛰놀듯 연주하던 솜씨, 쓸쓸하면서도 고아한 자태에 반했던 그 많은 한량들은 다 어디가고 싸늘하게 남겨진 그녀의 시신을 아전들이 거두어 공동묘지에 묻어야만 했는가? 근처 마트에서 사온 부안 막걸리에 아귀포, 골뱅이 과자, 뻥튀기 따위를 진설해놓고 잔을 올린다. 묘의 봉분 위에 술을 뿌리면서도 “인생 뭐 있나? 한 번 가면 그만인 것을” 하는 생각이 입안에 뱅뱅 돌았다. 쥐 뜯어먹은 머리처럼 잔디가 듬성듬성 나있는 매창 무덤의 봉분을 바라보노라니 마음 한켠에는 속세의 권력과 부귀영화에는 초연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가 아마도 19세 때 ‘이화우’를 지어 바친 첫 사랑의 사내이자 선조 때의 걸출한 평민시인 유희경이나, 문우로 사귀었던 허균 등은 제도권 밖의 인물들이거나 외톨이었다. 중이었으되 중이 아니요, 선사는 아니었어도 그 어떤 선사보다도 마음의 경지가 드높았던 진묵대사(1563-1633) 또한 그 세계의 권세 따위하고는 거리가 먼 민중의 여래였다. 정치, 사회 각 분야의 힘센 사람들과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이 요즘처럼 기쁘고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능가산 개암사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지극히 화평했다.

오늘따라 날씨도 쾌청하고 미세먼지도 별로 없어서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채석강으로 향했다. 다소 거칠어진 파도와 한가한 모습으로 물 위에서 파도를 타는 갈매기들을 뒤로하고 기생 ‘이매창’이 운영하던 객주에 가끔씩 들렀던 진묵대사의 수행처 월명사를 가보기로 한다.

월명암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지고 땅거미가 밀려왔다. 꼭 보고 싶은 진묵대사의 영정이 어디에 있는지 답답해 할 때, 하늘이 내 마음을 알았는지 때 아니게 웬 화주승이 지나가는게 아닌가? 그분이 일러준대로 닫힌 관음전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진묵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내 예상대로 삭발을 했으되 인자한 옆집 아저씨 같으신 모습이었다. 갑자기 온 우주를 얻은 듯 지극히 평온하고 기쁘고 반가웠다. 그동안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계신 분들이 저질러댄 이런저런 일로 우울해졌던 마음이 일시에 말갛게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몇 달간은 이매창의 시혼과 민중을 향한 측은지심 가득한 진묵대사의 크나 큰 배려 덕분에 평온한 마음으로 힘을 내서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원기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이원기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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