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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특집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만해 아들 한보국 “통일 후 조상 묘에 성묘하라” 유언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6>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5.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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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살고 있는 한용운의 손녀 한명심이 한용운을 회고하며 ‘통일신보(2001.12.29)’에 기고한 글.(한용운 연구 자료사진)

한보국, 중도적인 사회주의 중도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 국가건설
1945년 10월 ‘홍성군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한보국 위원장으로 활동
충남농민동맹위원장 지내, 9·28서울수복 때 의용군 따라 가족과 월북
김일성 1964년 한보국에 환갑상, 독립운동가의 후손 존재 알리게 해


한보국이 이끄는 ‘가야동지회’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는 방송을 직접 듣고는 바로 다음날 최명룡과 유승준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대책을 협의했다. 당시 모임에서 한보국 등은 해방을 축하하는 군민대회 개최 준비를 위해 ‘전홍성민중대회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준비를 거쳐 8월 18일 홍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군민의 해방축하식을 거행했다. 이날 군민대회에서 한보국은 경과보고를 했다. 홍성지역의 해방공간에서 한보국의 위상과 행보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해방 축하 행사를 주도한 ‘가야동지회’는 읍내 서문밖에 있는 감리교회에 모여 ‘홍성군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한보국은 자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자치위원회는 치안, 질서유지, 적산관리, 친일파 처리, 교육문제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고 군청과 경찰서를 접수해 위원회 사무실로 활용했다. 그리고는 지역사회의 혼란한 질서를 정비하고 유지하기 위해 치안대를 조직하고 읍면 단위의 자치위원회도 조직했다. 그리고 친일파숙청위원회를 둬 친일파 문제도 대응했다.

■ 한보국, 친일 봉건잔재 청산위해 노력
이런 활동으로 자치위원회는 자연스럽게 1945년 9월 2일에 출범한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됐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은 홍성지역의 자생적인 사회주의 세력과 중도우파적인 청년지식인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보국은 홍성지역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면서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한보국은 해방이전에도 좌우합작의 기조를 유지했는데, 이 노선은 해방 직후의 공간에서도 지속됐다. 다시 말해 한보국은 중도적인 사회주의 이념에 서면서도 중도우파의 민족주의 세력과도 제휴를 하는 맥락에서 국가건설을 염두에 두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충남인민위원회 가입여부를 놓고 건준 내부의 보수 세력과의 알력으로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말부터 분열, 해산됐기 때문이다. 한보국은 좌파세력을 규합해 노동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을 통해 인민정권을 창출하려고 했다. 1945년 10월 1일에 ‘홍성군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한보국이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한보국은 인민위원회를 통해 친일잔재와 봉건잔재를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한보국은 홍성군내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만들면서 해방공간의 홍성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 같은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홍성의 중도우파세력은 1945년 10월 7일 수덕사에서 모임을 갖고 사회민주동맹조직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독자적인 행보로 나갔다.

이후 한보국은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개최된 이민대표자대회에 홍성군대의원으로 참가했다. 이 회의는 남북한 동시선거가 불가했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정부를 수립하자, 북한에서도 사회주의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대회였다. 해주대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한보국은 1948년 겨울 무렵 피신 겸 지하투쟁을 위해 상경했다. 이 때 가족도 함께 서울로 갔으며 한보국은 1950년 3월에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출옥했다. 출옥 후 홍성에 내려와 홍성군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같은 해 6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형무소에서 풀려난 그는 홍성군당위원장과 충남농민동맹 위원장을 지내고 9·28서울수복 때 의용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한보국은 슬하에 아들과 딸 다섯을 두었으며 평양피복관리소 부지배인으로 평양의 애국열사아파트에서 상당히 순탄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964년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환갑잔치 상을 배려 받았고, 1977년 6월 30일 73세로 유명을 달리했으며, 임종 시에는 자녀들에게 통일이 되면 자신을 대신해 ‘할아버지(한용운)의 묘소에 찾아가 성묘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의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살고 있는 한용운의 손녀인 한보국의 딸 명심(북한에서 태어난 막내딸로 추정됨)이 2001년 12월 29일 통일신보에 한용운을 회고하며 쓴 글 ‘추억의 붓을 들고’에서 확인된다. 이 글에서 한명심은 북한에서의 한용운과 한보국에 대한 평가에 대한 단서를 암시하고 있다.

■ 한보국 월북, 30여명 자손 평양 거주
6·25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한보국의 생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재미동포 작가 홍정자 씨가 북한에 들어가 한보국의 자녀들을 만난 인터뷰 글을 월간 ‘말’지 1996년 1월호에 발표함으로써 43년 만에 알려지게 됐다. 홍정자 씨는 평양에서 1994년 10월 한보국의 딸 5명중 명숙, 명계, 명신 3명을 만났다며 상세하게 썼다. 4명은 홍성에서 낳고 막내 명심은 북한에서 낳은 딸로 추정했다.

‘한보국은 1949년 먼저 가족들을 강원도 연천으로 이동시킨 후 조직으로 돌아가 활동했다. 한보국은 1953년(전쟁 중) 국군의 추격을 받아 자강도 강계로 갔다. 중공군의 도움을 받아 평남 영원읍으로 옮겨 4년 동안을 지내며 가족들과 소식이 단절됐다. 그 후 황해도 영예전사자병원에서 3년 동안 중환자로 입원 치료 중 정신이 회복되면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당에서 각 군에 수소문한 결과 덕천 제사공장에서 일하는 맏딸 한명숙과 연결돼 1956년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보국은 회복이 불가능한 반신불수의 몸이 돼 있었다. 당에서는 몸이 성치 못한 그였지만 평양시 피복관리소 명예 부지배인 직함과 대동강변 아파트를 한 채 주어 소일하게 했다. 김일성은 1964년 환갑상을 차려주고 노동신문에 독립운동가의 후손에 대한 기사를 쓰게 해 존재를 알리게 됐다는 것이다. 다섯 딸들은 평양공산대학 혹은 제사공장 공장대학, 고등전문 피복과 학교 등을 졸업하고 모두 김일성 종합대 출신 남자들과 결혼 해 약 30여명의 자손들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고 홍정자는 기록했다.

한보국의 큰 딸 명숙이 홍성을 떠나던 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그는 홍정자 씨와 인터뷰에서 홍성에 대해 몇 가지를 기억하며 아버지가 남겼다는 “통일 후 조상 묘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전했다고 한다. 한명심은 ‘추억의 붓을 들고’에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 “불교인들 가운데 한용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1인민봉기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교승이었는데 조선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였습니다. 적들에게 체포당했을 때도 변호사도, 사식도, 보석도 다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겁에 질려 동요하는 기미를 보이자 감방의 변기통을 들어 내동댕이치며 이 더러운 것들아, 너희들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놈들이냐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고 할아버지인 만해 한용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한보국에 대해서는 “남쪽에서 여러 차례의 감옥살이에서 받은 고문의 후과로 몸이 허약해 북에 들어와서 장기간의 입원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가 생의 말년까지 여러 기관의 책임 일꾼의 직책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정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홍성읍 오관리 474의 3번지에 한보국이 살았던 집이 있었다. 현재는 홍성읍사무소 신축과정에서 없어졌지만, 두칸 정도 크기의 방 3개, 3칸 크기의 대청과 부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 번지의 등기부등본에는 22평 3홉 8작 목조 기와 주택이 등재돼 있었다. 이 집은 전용갑 전 월곡학원 이사장이 박흥양으로부터 매입했던 것으로 돼 있다. 전용갑 전 이사장은 당시 “이 집은 원래 한보국의 소유로 알고 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왜 한보국의 집이 박흥양 소유로 등기 돼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박흥양은 1959년 1월부터 1960년 5월까지 홍성군수를 지낸 사람이었다.

한보국의 집터인 오관리 474의 3번지 175평 대지는 한보국이 1944년 8월 9일에 구입한 것으로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다. 이 토지는 1964년 7월 6일 박흥양 전 군수가 한보국으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1964년은 한보국이 평양에서 환갑상을 받던 해였다. 1953년 국군의 추격으로 좇기는 사람이 어떻게 군수를 한 공무원에게 집을 팔고 갔을지는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후손들은 “남의 재산관리를 맡은 사람이 주인이 없자 부동산특별조치법 등을 이용해 자신에게로 돌려놨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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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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