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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특집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만해, 조선 고유의 임제종 창립 통해 선학원 설립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10>
서울 안국동 40번지 ‘선학원’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6.1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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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이 깊숙이 관여하며 설립된 서울 종로 안국동의 선학원(작은 사진은 설립 초창기 모습).

신간회, 민족주의·사회공산주의 반일민족유일당운동단체
만해 한용운, 선학원 태동부터 건립이념까지 깊숙이 관여
정인보 “인도에는 간디가 있으며,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홍명희 “7000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1인을 당하지 못해”


서울 종로 안국동 40번지 선학원 중앙선원. 이 건물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습만 달라졌을 뿐 그 위치에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선학원은 근현대 선지식들 대부분이 이사장을 지냈을 정도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다. 선학원은 1921년 5월 15일 서울 간동포교당(諫洞布敎堂) 보살계 계단에서 설립의 서막을 열었다. 그해 8월 10일 기공을 거쳐 4개월 뒤인 11월 30일 준공됐다. 선학원이 건립되기까지 만해 한용운 선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해 한용운과 선학원의 관계는 선학원의 직접적인 창설배경이기도 한 임제종 운동부터 살펴봐야 그 연유를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 만해, 선학원 태동부터 깊숙이 관여
1910년 10월 6일 굴욕적인 한일불교협약인 ‘조동종 맹약’이 조선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 승려 사이에서 체결되고, 다음 달인 11월 6일 이 맹약에 반대하며 임제종 운동이 전개됐다. 맹약의 핵심은 당시 한국 불교계의 대표기관인 원종(圓宗)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일본 조동종의 고문을 위촉하고, 조동종의 한국 포교에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조동종무원이 필요해 조선에 포교사를 파견할 때는 조동종무원이 지정하는 사찰을 숙소로 정해 포교와 교육에 종사케 할 것”이라는 굴욕적인 조항도 있었다.

만해 한용운은 훗날 임제종운동에 대해 “조선불교의 부흥을 도모할 때 원종(圓宗)의 맹약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단을 별도로 세워야 원종을 자멸케 함이 첩경이라는 견지에서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한국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사찰령 반포를 앞두고 있었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2년 서울 대사동의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 간판은 철거됐고, 만해 한용운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제종운동을 통해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님들의 노력은 선학원 설립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남전(1868~1936)·도봉(1873~1949)·석두(1882~1954)스님이 설립자금을 모았고, 임제종운동에 참여했던 만해·용성·만공스님 등은 설립이념을 민족불교의 확립과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뒀다.

만해 한용운은 선학원 설립 이듬해 쇠락한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키고자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에도 관여했다. 선종의 부활과 자립 활로를 위해 설립된 선우공제회는 1922년에 문을 열었다. 본부를 안국동 선학원에 두고 서무부, 재무부, 수도부의 3부를 중앙에 두고, 백양사, 마하연, 정혜사 등 각 사찰에 지부를 둬 유대를 긴밀히 하도록 했다. 당시 만해 한용운은 수도부(修道部) 이사소임을 맡기도 했다. 1924년 무렵 선우공제회의 통상회원 203명과 특별회원 162명을 합해 전체 365명의 회원이 소속돼 있었던 것을 보면 초기의 공제회는 그 창립취지와 운영의 투명성으로 인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불과 1~2년 만에 회원 수가 급증하고, 재정기반이 안정적으로 마련됐다는 것은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가 교단 내부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국불교의 안위와 결부돼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같이 만해 한용운은 선학원 태동부터 건립 이념까지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는 현재 선학원 2층 법당을 가면 알 수 있다. 이곳에는 7명의 설립조사와 1명의 중흥조가 모셔져 있다. 바로 만해 용운(萬海龍雲, 1879~1944), 만공 월면(滿空月面1871~1946), 성월 일전(惺月一全, 1866~1943), 도봉 본연(道峯本然, 1873~1949), 남전 한규(南泉翰奎, 1868~1936), 석두 보택(石頭寶澤, 1882~1954),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 초부 적음(草父寂音, 1900~1961)이다. 이 같은 선지식인들이 한데 모여 선학원을 만든 배경에는 민족불교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 이외에도 한국불교의 선(禪)을 바로 잡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불교의 선 수행의 상황은 만해 한용운의 논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에서 적나라하게 찾을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지금에 이르러 참선을 한다는 자 10인을 놓고 볼진대 진정한 선인(禪人)은 불과 1인이며, 입과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이 2인, 나머지 7인은 모두 밥 먹기 위해 앉아있는 자이거나 아니면 멋도 모르고 졸고 있는 자가 대부분이다.”라고 했다.

선학원 설립의 취지와 이념아래 만공 스님은 소위 일본 중처럼 변질되지 않고 ‘우리만의 선방(禪房)’ 마련을 천명했다. 또 성월 스님은 1912년 서울 인사동의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헐어 약간의 목재와 기와를 보탰다. 여기에 남전·도봉·석두 스님이 막대한 정재(淨財)를 출연하였다. 당시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의 부인 구지월화(具智月華)를 비롯해 왕실의 상궁나인들까지도 기꺼이 안주머니를 털었다고 한다.

■ 만해, 신간회 창립 경성지회장 맡아
이후 만해 한용운은 유심사(唯心社)를 얻기까지 백담사와 선학원에서 번갈아 가며 주석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이 회동서관에서 간행됐을 때는 선학원의 6대 이사장 석주 정일 스님이 인쇄부터 책 만드는 일까지 도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1926년에 만해 한용운은 6·10만세운동으로 선학원 근처에 잠복해 있던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되기도 했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의 억압과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민족진영과 공산사회주의자들이 합세해 일으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은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됐다.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1927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반일민족유일당운동단체가 바로 신간회(新幹會)다. 만해 한용운은 신간회 창립 당시 중앙집행위원이 됐고, 7월 10일에는 경성지회장에 임명됐다.

이와 관련해 석주 스님은 “신간회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사회정치단체였지만, 결사체(結社體)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면서 “만해 스님의 경성지회장 시절 선학원에서 회의를 많이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연구자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 ?)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으니, 조선 청년은 만해를 배우라”고 했다. 동화사 학인들과 만세운동을 부르기도 했던 고봉(古峰, 1890~1961)스님 역시 “한용운은 조선만이 아니라 세계의 한용운”이라고 극찬했다. 더욱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는 “7000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1인을 당하지 못하니, 만해 1인을 아는 것은 1만 명을 아는 것 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 더한 생동감과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만고(萬古)에 전하는 이름 없는 비석의 글이기 때문이다. 현재 후학들의 만해 한용운에 대한 추모는 문학과 종교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고는 있지만, 그 원천은 한국불교를 포함한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생을 위한 고뇌의 행적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사회정치단체였지만, 결사체(結社體)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니 당연히 일제의 감시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부터는 신간회가 주도하는 대규모 집회를 금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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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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