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를 생각하다
상태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를 생각하다
  • 노승희 <사과꽃발도르프학교 담임교사>
  • 승인 2023.09.14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벅스라이프’, ‘개미(Antz)’와 같이 의인화된 곤충 영화가 히트를 치던 때, 그의 책 ‘개미 제국의 발견’을 만나며 책의 저자인 최재천 박사를 알게 됐다. 동물행동학자인 그가, 그의 커리어와 쉽사리 연결하기 어려운 ‘공부’에 대해 책을 썼다니 놀라며 책을 폈고, 오지랖 넓은 석학의 과거와 미래, 동서와 좌우를 넘나드는 폭넓은 시선에 감탄하며 책을 덮었다. 

이 책은 안희경 저널리스트와 최재천 박사의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대담 속 배경은 수시로 70대 노교수의 과거를 오갔다. 세계적 석학인 그도 소위 ‘똥물학과’로 불렸던 동물학과에 의도치 않게 진학해 구멍이 뻥뻥 뚫린 엉터리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한 차례 위안을 받았다.
 

최재천/사이언스북스/1만 7500원.
최재천/사이언스북스/1만 7500원.

대가들을 만나보니 ‘대가인데 이런 것도 모르나’ 싶을 만큼 구멍이 있더라. 이쪽저쪽 덤비며 파고들다 보면 한쪽이 엉성해도 조금 더 깊숙한 쪽이 버팀목이 되어 공부의 집이 지어진다는 말에 나도 무엇이 됐든 나만의 집을 짓고 있겠구나 싶어 힘이 생겨난다. 똥물학과에서도 바닥을 치는 성적을 받았던 최 교수는 실수를 실수로 받아준 해외 생활에서 의욕을 되찾고 기량을 펼쳤다. 

그러면서 서서히 도저히 그의 이력과 매치되지 않는 일들도 겁 없이 무턱대고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실수를 실수로 받아주는 여유, 그런 여유가 우리 사회에 있는가. 영어 유치원부터 대기업 입사, 아니 결혼과 집 장만까지 단 한 치의 실수 없이 차곡차곡 쌓아가야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여유를 누가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러하지만, 저자는 계속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실수해도 된다고 용기를 준다. 

전혀 기대치 않게 책 속에서 발도르프 교육을 만났다.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반갑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근거를 들어 발도르프 교육을 소개할 수 있는 좋은 책을 찾았다! 하는 반가움도 컸다. 예기치 않게 3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지내는 노교수의 일상에서도 발도르프 교육과 통하는 점을 만났다. 과거 그는 사교계의 중심에 서서 온갖 모임에 참여한 뒤 밤이 돼서야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이후 해외 생활과 어린 아들을 본인이 직접 통학시켜야 하는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게 얻게 된 삶의 리듬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교수사회에서 핍박받으면서까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저녁 시간, 이후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리듬을 지켜왔고, 그 리듬이 그의 창의력과 체력, 더불어 다작의 이력을 만들었다. 삶의 리듬이 갖는 힘. 발도르프 교육을 만나면서 알게 된 ‘삶의 리듬’’은 아이들의 단조로운 일상에서 생겨난다. 일정한 시간에 먹고 자고 단조롭다 못해 심심해 미치겠는 그 일상 속 리듬의 힘은 아이들의 수업 시간에 드러난다. 

전날 평소보다 늦게 자거나 어딘가 다녀오는 일정이 있었거나, 아침에 밥을 먹지 않았거나 모든 생활 속 변수들이 아이들을 교실에는 앉아있지만 수업 시간에는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지향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자연스럽고 필요한 ‘생활의 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책 속에서 ‘발도르프’라는 단어를 툭툭 내뱉는 건 안희경 저널리스트다. 알고 보니 미국에서 아이를 발도르프 학교에 보내며 생활 속에 발도르프 교육 방식을 흠뻑 적셔온 안희경 저널리스트는 적절한 때에 최 교수의 이야기와 발도르프 교육을 연결시킨다. 한 예는 초등학생 2학년들의 구구단 배우는 방식이다. 구구단을 줄줄 입으로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콩주머니를 던지고 받으며 3씩 더해지며 수가 커지는 수의 리듬을 익히는 것이다. 이처럼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온몸으로 박자를 만들고 뛰고 손과 발을 움직이며 수와 글을 배운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서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것, 그게 진짜 내 것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동안의 교육 분야에선 모르는 척해온 것이 분명하다. 머리에 욱여 넣어진 지식은 삶에서 참으로 더디게 소화된다. 고맙게도 최근 연구들이 ‘모두가 알지만 모른 척하고 있던 것을 모른척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장내 미생물이 뇌 작용에 깊이 관여함을 밝히고 있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를 움켜잡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다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장내 미생물을 건강하게 먹이고 온몸으로 공부를 해야 할 터인데, 서울의 초등학생들은 하루 종일 학원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니. 그 아이들에게 욱여 넣어진 지식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챗GPT가 모든 지식을 모아 전해준다는 지금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고 어떤 공부를 하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까. 교과서 속 국·영·수만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전환의 시기, 하지만 거꾸로 가는 세상 속에서 이 책을 통해 ‘공부’에 대해 함께 대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듯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