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조국, 그리운 어머니,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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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조국, 그리운 어머니, 홍성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2.14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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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유럽의 분단국가이었던 서독과 동독이 통일국가를 위해 상호 신뢰하고 협력하는 화해의 바람은 전세계에 평화의 온기를 퍼트렸고, 동아시아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도 이해와 화해를 불러 일으켰다. 국내외 이응노를 아끼고 존경하던 문화계인사들은 서둘러 그의 국내 초대전시를 추진했고, 한국정부도 적극적 태도를 취했으며, 국내 언론계도 1988년 중반부터 이응노의 삶과 예술세계를 적극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를 옭아매었던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과 ‘납치미수사건’에 대한 이응노의 입장이 언론매체를 통해 전달됐고, 그의 예술가로서의 열정과 도전, 끊임없는 창작에 대한 실험과 의지 그리고 예술작품에 담긴 인류의 평화와 사랑에 대한 메세지, 분단된 조국에 대한 좌절과 아픔 등 고암의 70년 예술노정이 국민들에게 소상하게 알려졌다.

1988년 가을, 한국 언론에서는 <윤이상, 이응노-이향(異鄕)에서 본 조국> 신년 기획 다큐멘터리가 제작돼 이듬해인 1989년 1월에 방영됐다. 이응노의 프랑스 파리 고암서방에서 촬영된 이 영상에는 고암의 열정이 빚어낸 조각, 도자기, 문자추상, 군상 등 작품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그의 예술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소개됐고, 방송국 기자와의 그간의 여러 가지 사건들에 관한 대화를 통해 그의 가슴 아픈 심정이 조금이나마 국내에 전달됐다. 아울러 이 시기보다 조금 앞선 1985년 일본한인미술인단체가 이응노·박인경 부부를 일본에 초청해 전시를 개최했고, 1986년 이응노 부부의 삶과 예술여정, 그의 예술철학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 담긴 <우리나라-한국, 일본, 파리>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이 영상에서도 이응노 화백의 예술가로서의 업적이 잘 드러나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 말하지 못하는 예술가로서의 한스러움이 가득 숨어있다.

1989년 1월 호암갤러리(서울)에서 ‘고암 이응노전(1989.1.1~2.26)’이 기획 개최됐고 이응노는 1958년 도불(渡佛) 후 약 30여 년 동안 제작한 1000여 점의 완성작 중 백여 점을 전시했다. 이응노의 분신이자 혼이 담긴 그의 작품들은 그리운 조국, 서울에서 많은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개최 중이었고 한국 언론에서도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여러 찬사들을 연일 신문지면에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1989년 1월 10일, 이응노의 부고 소식이 한국에 날아들었다. 그토록 가슴시리게 그리워했던 ‘그리운 어머니’, 늘 입버릇처럼 보고싶다 말했던 ‘어릴적 뛰어놀며 그림 그리던 고향 홍성의 너른 들녘과 용봉산, 월산, 수덕사’를 눈과 마음에 다시 담기를 소원했지만, 1989년 1월 16일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2024년은 고암 이응노 화백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응노미술관과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을 통해 이응노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훌륭한 연구성과들을 냈다. 그러나 한국, 일본, 프랑스라는 지역적 한계와 식민지시대, 근대, 현대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어 그만큼 연구의 범위가 제한적이기도 하다. 이응노 화백의 예술세계와 예술정신에 대한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내고 깊이 있는 노력을 더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화단에서 고암 이응노 화백 만큼 자신의 예술양식을 찾기 위해, 독보적인 예술가적 위상을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작가는 값진 보석처럼 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지난한 역사와 얽히고설킨 예술인, 오해와 편견의 누명에 억눌렸던 예술인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응노는 그 고단했던 인고의 예술여정에서 권력에 아첨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선 적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의 예술노정을 개척했을 뿐이었고, 흔들림 없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 나아갔다. 그의 붓은 대나무 잎에서 시작해 풍경으로, 서체로, 추상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기나긴 여정을 순환했다. 붓질 하나에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세상의 모습과 그 속에 담긴, 삶을 살아내는 인간의 수다한 모습들을 진솔하게 담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술인으로서의 삶과 예술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고암 이응노 화백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뜻깊게 기리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황찬연 <천안시립미술관 시각예술팀장,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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