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대표 독립운동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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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대표 독립운동가는 누구인가?
  • 이상권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4.0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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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3년전인 지난 2021년 4월 홍주신문 칼럼으로 다음과 같은 기고를 했다.

지난 2020년 내포신도시 홍예공원에 ‘충남의 대표 독립운동가 5인의 조형물’이라는 이름 하에 유관순, 이동녕, 한용운, 김좌진, 윤봉길 등 5명의 독립운동가 조형물이 세워졌다. 이 중에서 유관순과 이동녕은 천안 출신이고, 한용운, 김좌진은 홍성 출신, 윤봉길은 예산 출신이다. 한편 이동녕을 제외한 네 분은 모두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서훈받은 분들이고, 유독 이동녕만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은 분이다.

동상의 배치는 유관순 열사가 정중앙에 우뚝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나머지 네 분을 이끌고 있는 형국이다. 건국훈장을 받은 충남 출신 독립운동가로서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서훈받은 임병직(부여), 2등급인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이상재(서천, 계몽운동), 이종일(태안, 3·1운동), 민종식(청양, 의병활동) 등의 동상은 없다.

동상에서 빠진 이분들은 유관순 열사가 서 있는 발판 옆구리에 이름만 새겨져 있다. 한 마디로 등급과 지역의 형평성을 잃은 독립운동가의 거리가 조성됐다는 취지의 칼럼이었다. 

특히 유관순 열사의 서훈 과정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의견을 제시한 바 있었다. 

1947년 소설가 박계주가 ‘경향신문’에 ‘순국의 처녀’를 기고했고,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와 박인덕 등이 김구 주석을 앞세워 유관순기념사업회를 구성했으며, 1948년 소설가 전영택이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펴냈다. 이로써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인 유관순이 탄생했다.

그 이전까지의 유관순은 이화여고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많은 여학생 중의 한 명이었을 뿐이었고, 일제 경찰이 집계한 3·1만세운동 사망자 7509명이나, 부상자 1만 5961명 중의 한 명도 아니었으며, 단지 체포 구금됐던 4만 6948명 중의 1명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희석시키고 싶었던 신봉조, 박인덕, 전영택 같은 친일파들의 노력으로 유관순은 1962년에 건국훈장 3등급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반면에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선봉장이었던 조인원은 5등급인 애족장을 추서받았을 뿐이고, 아우내장터에서 사망한 유관순의 부모도 4등급 애국장을 서훈받았을 뿐이었다. 3·1만세운동과 관련해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분은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세 분뿐인데, 2019년에 유관순은 법률로 금지된 이중 추서를 받아 한용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것이라는 취지였다.

2019년도에 천안시을 지역구 박완주 국회의원은 ‘유관순 서훈격상 특별법’을 발의했고, 양승조 충남도지사는 ‘유관순 열사 서훈 상향 100만인 서명운동’을 추진했었으며, 김지철 충남교육감은 ‘이동녕 서훈 격상운동’을 벌였다. 나는 바로 이들이 충남의 대표독립운동가 거리를 조성한 것으로 본다. 아마도 천안 출신인 유관순과 이동녕을 충남을 대표하는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치켜올린 공적을 바탕으로 천안에서 오래오래 정치적으로 울궈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2021년 4월의 칼럼에서 필자는 양승조 당시 충남지사를 향해 충남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거리 조성에 숨겨진 의도를 지적하면서, 도민 특히 홍성과 예산 주민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바가 있었다. 서로 소속 정당이 다르긴 했지만, 제18대 국회에서 의정활동을 같이한 적이 있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었다. 그런데 결국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독립운동가의 거리에 서 있는 5인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중에서 홍성과 예산 출신인 한용운 선사, 김좌진 장군, 윤봉길 의사의 동상은 말씀은 못하시더라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아니하실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양승조 전 충남지사는 천안의 과거 자기 지역구가 아니라, 하필이면 예산·홍성 지역구에 전략공천을 받았다.

사죄와 사과가 늦어져서 낭패한 대표적 사례가 있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직에 오른 지 불과 서너 달밖에 되지 않은 1961년 4월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주도로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혁명정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미군으로부터 훈련받은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내세워 쿠바를 공격하다 실패한 사건이 있다. 일명 피그스만 침공작전이었다. 하지만 개전 사흘 만에 소련군으로부터 훈련받은 쿠바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거의 대부분인 1113명이 포로로 잡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부터 계획된 이 작전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나 미군의 직접적인 개입을 부인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쿠바와 미국 간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면서 소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쳤고, 쿠바는 공산주의국가로 체제를 갖추게 됐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시에 진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고, 상대를 존중하면 존경받고 승리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 역의 경우에도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판일 가능성이 있다. 
 

이상권 <변호사, 전 국회의원,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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