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 새우젓 토굴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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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 새우젓 토굴속에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4.01.1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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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29>

 


숨소리를 죽이고 기다리는 거야
머리위에서 떨어지는
차디 찬 물방울 소리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앞길을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짙은 어둠을 삭혀가는 거야

기다림이란
메아리 없는 굴속에서
외로움을 삭혀
그 동안 끌고 다니던 몸을
무엇인가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

음지와 양지 없는 곳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없는
다만 찬 물방울 하나로
천지가 무너지듯
침묵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져버리는 거야
‘나’라는 것도 잊고
살고자 하는 것도 잊고
죽는다는 것도 잊고, 오직,
한 생각으로 기다리는 거야
깨달음의 완숙한 맛, 그날까지

예로부터 ‘새우젓’하면 ‘광천’, ‘광천’하면 ‘새우젓’이었다. 광천에서 ‘새우젓 장터’가 이루어지기는 고려시대 물물교환이 형성될 때부터라고 전해져 온다. 이 때 광천에는 두 개의 장이 섰는데, 그 하나가 옹암포구의 ‘새우젓장’이다. 조선말엽 서해안 일대의 고기잡이배가 잡아 온 새우를 옹암포(甕岩浦)에서 천일염에 절여 팔면서 시장이 형성되어 번성기를 맞아 우리나라 첫째가는 새우젓 장터로 자리잡게 되었다. 토굴새우젓의 등장은 지금부터 50여년 전, 옹암포 전성시대의 마지막 무렵인 1960년대 초 그 비법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른다. 원래 새우젓은 조랭이 또는 조쟁이라 불리는 항아리에 저장하는데, 여름에 부패하여 ‘고랑젓’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고랑젓이 생기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고(故) 윤엽원 씨가 시험적으로 금광 폐광에 새우젓을 넣어 보았다가 김장철에 가보니 잘 숙성되어 잇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그가 토굴을 판 이후에 토굴의 효험을 체험한 마을 사람들은 연이어 토굴을 파시기 시작했다. 순전히 사람의 노동력으로만 팠다. 이 토굴 속에 새우젓독을 넣기 시작한 이래, 광천 새우젓은 토굴새우젓으로 소문나게 되었고, 현재는 서해와 남해에서 잡은 새우를 이곳에 저장해 공천토굴새우젓으로 재탄생하여 대표적인 새우젓 판매단지로 자리 잡았다. 가을 김장철이면 전국에서 상인들과 소비자가 모여 문전성시를 이루는 새우젓의 대명사 고장이 바로 옹암(甕岩)이다. 이 옹암포는 일제 때만 하더라도 충남의 가장 큰 시장인 광천시장의 관문으로써 안면도를 비롯한 서해안 도서의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래서 4일과 9일 장날에는 150여 척의 어선과 장배가 드나들며 크게 번영을 누려왔던 포구였다.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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