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진 학교, 향교(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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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 진 학교, 향교(鄕校)
  • 이현조 <문화in장꾼·시인·주민기자>
  • 승인 2016.02.04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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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결성향교에 상주하면서 향교를 찾는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향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이가 거의 없다. 향교는 우리 선조들이 세운 우리나라의 교육기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향교에 대해 문외 할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왜 그런지 짐작하시라 믿고, 필자가 알고 있는 향교에 대한 짧은 지식을 전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된 태학이 그 시초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당(唐)나라 학제를 모방하여 중앙에 국자감과 국자감을 축소한 형태의 지방교육기관인 향학이 세워졌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의 성균관, 지방의 향교로 학제가 바뀌며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과거시험이 폐지되면서 막을 내리고, 이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신교육이 실시되면서 현재의 학제로 이어져오고 있다.
성균관은 한양에 단 하나뿐이었던 조선시대의 국립대학교이며, 향교는 국립기숙중고등학교로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마다 하나씩 세워졌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234개이다. 그리고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립학교로 현재 약 530여개가 남아 있다. 향교는 교과서를 비롯한 향교운영에 필요한 모든 재정이 학전(學田)·학노(學奴) 등의 형태로 국고에서 지원되었으며,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촌·교동·명륜동이라 하여 특혜촌으로 지정하여 향교에서 필요한 일손을 충당하였다. 또한 흥학(興學)의 방편으로 향교의 운영 실적이 그 지방 목민관의 인사고과에 반영되어 적극적인 지방비의 투입을 유도했다.
향교에서 공부하던 학생을 유생 또는 교생이라 한다. 16세 이상의 평민신분 이상이면 누구나 입교할 수 있었다. 향교의 선생님은 종9품의 훈도(訓導)와 종6품의 교수(敎授)가 담당하였다.
향교교육의 목적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인재양성과 민풍(民風)순화에 있었다. 따라서 향교의 교과목은 소학(小學)·삼강(三綱)행실·사서삼경(四書三經)·성리(性理)대전·여씨(呂氏)춘추·근사(近思)록·심경(心經)·제사(諸史) 및 중국 선유(先儒)의 제설 등이다. 이중에도 가장 중요시했던 교과는 소학(小學)이었고, 그 다음이 삼강(三綱)행실과 이륜(二倫)행실 등 도덕·윤리과목이었다.
오늘날 교육하면 많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교육은 미래인재 육성이란 측면에서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현재의 교육이 백년의 미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백년에 어떤 희망을 걸 수 있을까? 기라성 같은 인물을 길러낸 홍성이 백년의 미래에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그 백년의 대계를 위하여 학교교육이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잊혀진 우리의 학교에서 분담하면 어떨까? 과연 향교가 오늘의 교육을 분담할 수 있는지 이쯤에서 우리는 돌아보아야 한다. 공자이후 5000년간 동양을 지탱해온 유학의 본지(本志)가 무엇인지. 오늘날 우리는 유학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지면이 허락한다면 다음에는 유학의 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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