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산의 유래 바로 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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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의 유래 바로 알리자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7.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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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의역하면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이야기는 문학적 허구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이것이 관광산업으로 연결되고 성공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반드시 제시돼야 한다. 

용봉산은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며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널리 알려졌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입구 구룡대 다리를 건너면 멋진 유래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지금의 용봉산은 고려시대에는 북산(北山), 조선시대에는 팔봉산(八峯山)이라 불렀다. 일제시대 때 홍성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용봉산, 예산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수암산으로 바뀌었다(용봉사와 수암사라는 절의 이름을 따서).” 필자 역시 2007년 처음 홍성에 와서 이런 내용을 접했었고 글에도 인용했던 기억이 있다.

앞서 말한 일제시대는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용봉산이라는 이름은 일제가 붙인 것으로 불과 100년밖에 안 되는 그야 말로 별것 아닌 산으로 전락한다. 여기에 일제가 홍주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잘랐다는 시정의 말까지 보태면 별것 아닌 것에서도 더 형편이 없어진다. 정기를 자를 때 붙인 이름을 여전히 자랑스럽게 애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용봉산 스토리텔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학문이 일천해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자료와 선행연구를 살펴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1차 자료에 근거한 전문적 연구를 기대하며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진다. 용봉산이라는 산명(山名)은 1607년 홍주목사를 지냈고 평생 4379수의 시를 남긴 이안눌의 《동악집》 〈강도록(江都錄)〉, 용봉사 주지(師 洪州人 住龍鳳寺) ‘학윤스님에게 주다(贈學允上人)’에서 처음 보인다. 이 시는 1618년 강화부사시절 용봉사 학윤스님을 만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고 본다.

逢僧江國憶洪都(강화도에서 스님을 만나니 홍주가 아련히 떠오르는데), 龍鳳山光水墨圖(용봉산의 빼어난 경관은 먹으로 그린 듯 했었지), 惆悵十年南又北(십년동안 서글펐는데 또 남북으로 떠나면), 白頭重對八峯無(백발로 거듭 만났으니 팔봉산은 만날 수 없겠지) 마지막 구절의 팔봉산은 고향 서산(면천)으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같은 시에 동일한 산이 중복되는 것을 피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 사찬 지리지 ‘동국여지지(1656년)’에 “八峯山, 在州北八里, 一名龍鳳山, 山上石峯列立如鉅, 世稱小金剛, 又有將軍石, 高麗崔瑩嘗遊憩, 故名(팔봉산, 홍주 북쪽 8리에 있다. 일명 용봉산이라고 한다. 산 위로 석봉(石峯)이 마치 톱니처럼 나란히 솟아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소금강이라고 일컫는다. 또 장군석(將軍石)이 있는데, 고려 최영(崔瑩)이 일찍이 노닐고 쉬던 곳이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명확히 기록돼 있다. 

이후 1764년 홍주목사를 지낸 홍양호의 시 ‘이진사와 용봉산을 노닐 때 송낙암 시를 던져주기에 화답으로 부치다(李上舍遊龍鳳山, 投示松落菴詩, 和而奇之)’에 나온다. 이때 송락은 제(齊)나라 문인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푸른 소나무 그늘을 짓고’라는 청송낙음(靑松樂陰)에서 온 것으로 본문을 근거로 유추해보면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바위’ 정도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일각에서는 이 시를 근거로 두고 용봉산에 송락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제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외에도 ‘조선팔도지도(1767~1758)’에는 용봉산, 팔봉산, 수암산 모두가 나타난다. 따라서 이안눌이 1607년 홍주목사를 지내기 이전부터 용봉산이라 불렀음은 명확한 사실이니 만큼 홍성군은 지금이라도 용봉산 유래비 및 소개 자료 전반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것은 조선후기를 살았던 백암성총(1631~1700)의 ‘홍주 팔봉산 용봉사의 새 누각 기(洪州八峯山龍鳳寺新樓記)’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용봉사라는 절 불당 앞, 대나무 시냇가에 누각을 세웠다. △(훈(勳) 상인이 일러주기를) 태고(太古) 스님이 처음 개창해 임자년의 난리에 화재로 쇠락한 것을 지금 새로 짓는다고만 하였다. △태고 스님은 고려 말 두 임금의 조정에서 국사를 지낸 분으로 속세 본관은 홍주 사람이다. △석옥화상을 참례하고 밀인(密印)을 얻어 우리나라로 돌아오셨고 그때 이 산에 절을 처음 개창하시고 지내셨다. 이 누각은 태고의 후인이 일어나 중창하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이겠는가(叅石屋和尙, 佩密印, 尋還海東, 始開此山而居之, 此樓起太古後人踵新之,豈偶然哉). 이 기록을 미뤄 보면 현재 용봉사는 용봉사에 딸린 말사(末寺)이며, 큰 절은 ‘용방치기사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용방치기’는 용이 사는 동네인 용방(龍坊)에 어귀라는 뜻의 ‘치기’를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 용방축(龍坊築)이라는 축대를 지난 덕산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는 옛 문헌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태고보우가 홍주와 직접 관계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공민왕 5년 태고보우를 왕사로 모시고, 그 덕화를 받들어 홍주를 목으로 승격시켰으며, 입적 후 용봉산 청송사에 사리탑을 봉안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함으로써 홍주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홍성군은 ‘국가산단 유치’에 이어 용봉산을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사업에 있어 좀 더 나은 스토리텔링을 마련하기 위한 전문적 연구가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범상스님 <석불사 주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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