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민족성을 중시한 한국적 모더니즘 회화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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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민족성을 중시한 한국적 모더니즘 회화의 추구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7.1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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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시절 이응노는 마츠바야시 게이게츠 선생의 지도하에 묵죽화와 같은 전통 문인화에서 벗어나 그림의 소재를 현실에서 찾고, 필법도 세밀을 주로 사용하며 대상을 클로즈업해 사실적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화풍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을 10여 년간 왕래하며 금강산을 비롯해 서울 한강 주변과 경복궁, 충남 공주, 부여, 홍성 등지를 여행하며 부지런히 사생을 하며 사실적 표현능력을 키웠다. 아울러 전통적인 관념산수화에서 탈피해 사실적 표현과 서양화풍의 원근법이 가미된 풍경, 작품의 주제의식이 강조된 사생과 사의가 일치한 반추상 풍경화 양식을 보인다.

1939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황량荒涼>이 특선을, <하일夏日>, <소추蕭秋>가 입선을 수상했고, 제19회 조선미전에 <봉춘흥아逢春興亞의 집>을 출품해 입선을, 일본에서 개최됐던 <일본화원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하며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며 신남화 양식의 대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이응노는 일본 활동을 정리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그리고 사회와는 인연을 끊고 고향에 묻혀 농사지으며 그림에만 전념하면서, 일본 활동 중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한국적인 것, 한국적 미학, 민족적인 것 등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된 한국화단에도 강력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일제가 강요한 화풍이었던 향토주의 굴레를 벗어나서 전통적 서화의 정신을 되찾으려는 움직임, 한국적 고유성과 민족성이 담긴 예술 운동, 국제화와 동서융합의 신미술 운동,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앵포르멜 경향에 젊은 예술가들이 도취되는 움직임 등이 나타난다. 

더불어 미술비평에서도 새로운 사조들과 평론가들이 등장하며, 한국미술계에 새로운 실험정신을 불러 일으켰고, 대단히 많은 미술가 단체들과 거대 규모의 미술가 연합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개인과 집단을 불문하고 숱한 전시회가 개최됐으며, 언론매체를 통해 각양각생의 미술비평과 평론이 쏟아져 나왔다.  

불안한 국내 정치적 움직임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가 급변하며, 1950년 6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국 사회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몸과 마음에 새기게 됐다. 

이 시기 이응노 화백 또한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할 수 없었고, 매일매일을 술기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이것은 세계1·2대전을 겪은 전 세계 수많은 시민들이 절망 속에 빠져 허무주의로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적인 필연적 과정이었다. 하물며 외아들 문세가 전쟁통에 납북됐으니 생이별을 당한 아비의 큰 슬픔을 어찌 가눌 수 있었을까.

다행히 이응노는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리고 전쟁의 참상과 국가재건을 위한 노동자들의 모습, 시장풍경 등 이상적 세계가 아닌 우리의 현실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냈다. 그리고 사생과 소묘, 필묵을 결합한 추상형식을 추구하며 한국화단의 획일화와 해외미술 경도로 치닫는 미술계를 질타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넘어서서 한민족으로 하나되기를 평화적 통일을 염원했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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