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으로 간 에트랑제(Etranger), 이응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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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으로 간 에트랑제(Etranger), 이응노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8.10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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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미술은 분명 식민시대를 겪은 우리 민족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Nationalism) 운동에서 발원했다. 강제 병탄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식민지 시대 때 자행됐던 일본 화풍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민족미술에 대한 논의가 해방공간 화단에 주요 쟁점이 됐다. 

김용준(金瑢俊, 1904~1967), 길진섭(吉鎭燮, 1907~1975), 김주경(金周經, 1902~1981),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윤희순(尹喜淳, 1902~1947) 등 식민지 시대에 등장한 미술이론가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시급히 미술작품 내부의 일본적 요소를 타파함으로써 한국미, 한국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우리 미술의 특색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대의식은 식민지 상황을 벗어난 미술가 누구나가 안고 있는 당위 명제였고, 민족주의시대에 참다운 민족미술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지침의 첫째 항목이었던 것임은 틀림없다.

특히 이 시기의 이응노의 예술관은 윤희순의 논지와 유사한 성향을 보이는데, 윤희순의 1946년 출간한 《조선미술사연구 : 민족미술에 대한 단상》을 통해 제기한 ‘동서양미술의 특성과 차이점, 20세기 동서미술간의 교류에 대한 인식, 민족문화와 민족미술에 대한 방향성과 동시대 한국미술의 과제’ 등 해방공간에서 이응노가 향후 자신의 작품세계의 방향성을 설정하는데 이론적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946년 이응노는 장우성(張遇聖), 이유태(李惟台), 배렴(裵濂), 김영기(金永基), 조중현(趙重顯), 정홍거(鄭弘巨), 조용승(曺龍承) 등과 함께 한국화가단체인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했고, 일본색 청산과 전통회화의 민족적 정통성 회복 운동을 시도했다. 비록 1948년 3회전을 끝으로 중단됐으나 한국화단에 예술정신과 기법면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응노는 신문지면을 통해 자신의 예술론과 한국화단의 시대적 성찰을 요청하는 글을 게재했다. 특히 1957년 6월 서울신문 ‘불온작품’, 10월 1일 조선일보 ‘국전의 정화를 위하여’ 등 한국화단의 제문제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고, ‘국전 추천작가 사퇴서’를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이응노의 1940년대 작품세계는 신남화양식의 풍경이 중심을 이뤘으나, 1950년대 작품세계는 이를 벗어나 자유롭게 형태를 해체하고 묵선으로서 운동적인 리듬과 자유분방한 조형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강한 필묵법과 대상을 대담하게 생략했고, 농묵과 발묵,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현대적 추상화 양식을 띄게 된다. 

이러한 작품세계는 여러 통로를 통해 알려지며, 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세뉴에게 한국화가 이응노의 그림이 소개됐고, 1956년 자크 라세뉴는 이응노에게 파리로 초청해 개인전을 개최하고 싶다는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불분명한 이유로 이응노에게 여권을 내어주지 않아 2년 남짓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던 중 1957년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가 주최하는 ‘한국현대미술전’을 위해 미국 조지아 대학 동양미술 교수인 엘렌 프세티 코넌트(Ellen Psaty Conant)가 내한했고, 현대적이면서 개성이 돋보이는 국내 36명 작가의 80여 점을 출품작품으로 선정했는데, 이응노의 <출범>, <산>이 선정됐고 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 월전 장우성, 남정 박노수 등의 작품이 선정됐다. 이를 계기로 월드하우스와 5년 전속계약을 맺게 됐고, 선정된 두 작품은 록펠러재단에서 구입해 뉴욕근대미술관에 기증하게 되는 고무적인 일들이 발생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서 비로소 1958년 3월 이응노는 서울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도불전’을 개최했고, 같은 해 12월이 돼서야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다. 

1959년 주한독일대사 헤르츠 박사의 주선으로 프레스텔 화랑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대학 공동 주최로 이응노·박인경 전시를 개최했는데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고 독일의 언론지 ‘보너 룬트샤우(Bonner Rundschau)’, ‘노이에 프레세(Neue Presse)’에 이응노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를 계기로 쾰른 현대미술관의 부속 갤러리, 본 시립미술관 등에서 순회전을 개최한 후 1960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다. 

황찬연 <천안시립미술관 시각예술팀장,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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