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리를 다시 보자
상태바
남당리를 다시 보자
  • 조남민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1.09 08: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당리가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올해 여름, 전국 최대규모인 물놀이형 음악분수가 있는 남당항 해양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한 남당항 일대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던 ‘즐길거리’가 조성돼 축제광장, 체험 분수, 네트 어드벤처, 트릭아트 존 등이 생겨났다. 

특히 체험 분수는 분수를 맞으며 물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재밌게 꾸며졌고, 천혜의 관광자원인 바다와 항구, 죽도가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입소문이 더해져 홍성의 핫플레이스로 빠르게 등극했다. SNS에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인증샷’들을 수두룩하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이곳에서 대규모의 국화축제가 벌어졌고 ‘김장재료전’과 함께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 이곳의 광활한 광장을 이용한 다양한 행사가 추진돼 전국의 관광객을 끌어모으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남당리 아래쪽으로 천북 굴 단지가 있고, 중간에 있는 모산도의 풍력발전기는 이국적 느낌을 주는 명소가 된 지 오래다. 위쪽 해안도로 근처에는 ‘노을 전망대’가 천수만 바다 위에 설치돼 안면도를 조망하게 해주고, 조금 더 위쪽으로는 곧 완공될 높이 65m의 속동전망대 스카이타워(홍성 스카이타워)의 아찔한 위용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옆으로는 서산AB지구방조제의 입구인 ‘궁리’가 사계절 아름다운 어촌 풍경을 제공한다.

남당리를 중심으로 한 해안도로 주변이 앞으로는 홍성의 관광지도, 충남의 관광명소를 크게 바꿀 것이라는데 별로 이견이 없다. 홍성의 명소로 새롭게 재탄생하는 남당리, 그곳은 어떤 곳일까. 

서부면 남당리는 원남당, 소도 그리고 내동으로 이루어진 3개의 행정리를 갖고 있는 곳이다. 뒷산인 투구봉(142.5m) 산자락에서부터 아늑하게 펼쳐진 마을이 바다로 이어져 내려오고, 대대로 인심 좋고 이름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곳이다. 

농·어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남당리 방파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해안가 주변으로 김을 생산하기도 했다. 수룡동과 마찬가지로 바닷가 길옆 주변까지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지금은 신축건물로 이전하고 그 일대에 너른 공간이 형성됐다. 이로 인해 대하 새조개 등 크고 작은 축제가 연중 개최될 수 있었고 이렇게 ‘남당’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런데 남당리는 사실 그 전부터 유명하던 곳이다. 18세기 기호유학을 이끈 대 유학자 남당(南塘) 한원진 선생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조선의 문신이자 유학자 사상가로 천문 지리 병학 산수에도 통달했으며,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다. 일찍이 서인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그중에서도 이름이 높아 권상하의 수제자 8명을 뜻하는 ‘강문 8학사’의 주요 인물로 손꼽혔다. 한원진은 일생 동안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으로부터 이어진 노론계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숙원사업에 매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숙종 43년, 학행으로 천거 받아 관계에 진출하였으나 경종 1년에 노론의 실각과 함께 사직하였고, 영조 1년 경연관에 뽑혀 강학했으나, 소론 배척론을 펴다 탕평책에 어긋난다 해 삭직되었다. 영조 17년에 다시 복직됐으나 사퇴하고 이후 학문에만 전념했다. 

특히 조선의 3대 철학적 논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 인간의 성품과 사물의 성품이 같은지 다른지를 분석하는 인물성동이론)’을 주도하면서 커다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동문이었던 외암(巍巖) 이간(李柬)과 치열한 학문적 논변을 벌여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고 논리정연하게 펼쳤다. 

여름날 소낙비가 내리듯 시원시원한 필력으로 주자학 관련 저술을 비롯해 정학(正學)을 수호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생 동안 이론작업을 통해 남겨놓은 ‘남당집’을 비롯한 그의 저술들은 후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저들로 꼽힌다.

남당 한원진의 정통 성리학은 충절의 고장 홍성이 배출한 많은 충의열사들의 정신적 배경이 돼 한말 위정척사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홍주의병을 비롯한 항일의병운동의 사상적 근간이 됐다.

특히 그의 사상은 의병대장 지산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해, 만해 한용운 선사와 백야 김좌진 장군 등 홍성 출신의 충절 위인을 비롯한 인근의 수많은 애국지사에게 큰 영향을 줬다. 청운대학교에는 한원진의 학문적 업적을 연구하는 ‘남당학연구소’가 운영되고 있고, 서부면 양곡리에는 한원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양곡사’가 있으며 인접한 신리에 묘소가 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이 ‘남당리’와 관계가 있음에도 아직까지 지역에서 제대로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지만, 한원진은 남당리의 발전과 함께 향후 새롭게 조명돼야 할 홍성의 큰 역사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