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개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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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개인의 시대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2.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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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가족 개념이 바뀌고 있다. 전통적인 확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그리고 핵개인 시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송길영 작가는 《시대예보》를 통해 ‘핵개인의(Nuclear individuals) 시대’가 도래했다고 했다. 보통 혼자 사는 사람들로, 결혼과 육아보다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개인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A씨는 90년대 생으로 남성 직장인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구성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아니, 결혼 후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표상도 없다. 퇴근하면 집(오피스텔)에서 인터넷으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를 연거푸 마시며 잠을 쫓는다. 불안하고 예민한 순간들이 지속되지만 계획대로 자격증을 취득할 때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한 것처럼 희열과 행복감을 경험한다.

올해도 D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고, 시험을 치뤘다. 가채점을 해보니 불합격이었다.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했다. 주체할 수 없는 화는 국내 최대 규모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Dcinside)에서 터졌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것보다 자신을 실망시킨 자신이 수치스러웠고, 용서할 수 없었다. 수십 명의 공권력이 동원됐고, 두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A씨가 사용하던 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이 모두 압수됐고, 자신이 유일하게 믿었던 육체는 구속됐다. 

A씨는 14세부터 혼자 살았다.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J대학에서 무료로 야간학교가 운영되고 있음을 알았다.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 J대학을 오가면서 열심히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같은 해에 중졸, 고졸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통지서를 받은 날,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곁에 없었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혼자 삼켰다. 그리고 자신만이 이 세상의 무기이고,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주유소, 편의점, 서빙, 커피전문점, 놀이시설 등 다양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은 어느 추운 겨울, 도시가스 요금이 체납돼 가스가 끊기고, 차가운 물로 샤워하고, 냉기 가득한 방에서 벌벌 떨었던 기억들은 이 세상에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의지와 신체뿐임을 뼈저리게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A씨에게 가족은 최초로 혹독한 사회 훈련을 시켜준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아버지, 어린 시절 함께 살았을 때 전혀 화목하지 않았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생활하는 핵가족이 해체되고, 어린 시절부터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 기쁨의 순간들을 만들어야 했기에 요즈음 핵개인의 시대라는 말이 A씨에게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A씨는 가족이 있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핵개인과 자신은 매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90년대 또래와 대화를 하다 보면 이야기 소재의 부족함을 느낀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학령기, 청소년기 때 유행한 브랜드, 즐겨 시청한 에니메이션, 인기 많은 게임 등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퇴근 후 저녁이나 주말에도 혼자이기에 동료들이 가족 얘기를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때마다 A씨는 ‘가족’의 한계를 ‘자격증’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무의식적 행동의 세계가 작동된다. 자격증으로 자신을 입증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A씨는 자신의 삶을 면도날 위에서 발레를 추는 무용수와 같다고 했다. 그만큼 긴장하고,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상담자는 A씨가 냉혹한 겨울 추위보다 더 힘겨운 15년의 삶을 살아온 힘에 놀라움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분명 가족에게 받을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있지만,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행복을 추구하면서 좀 더 일찍 핵 개인의 삶을 걸어온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명옥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 박사·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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