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신도시 3만 명 시대를 맞이하며-《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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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신도시 3만 명 시대를 맞이하며-《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고
  • 장정우 <공익법률센터 농본 활동가>
  • 승인 2024.01.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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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홍성역 주변 풍경이 역세권 개발로 확 바뀌었다. 역세권 개발을 기대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대로 홍성에 전철과 고속철이 들어오면 홍성이 환골탈태하듯 발전할 수 있을까? 내가 홍성에서 지낸 지난 25년 사이에도 홍성은 조금씩 도시가 됐다. 롯데리아만 있던 동네에서 맥도날드, 버거킹, 서브웨이 심지어 스타벅스를 두 군데나 보유한 지역이 된 것이다. 그 변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미즈가 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현대의 풍요로움과 빈곤(저개발)을 ‘가부장적 자본주의’라는 틀을 통해 분석한 책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일부는 가부장제와 여성,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고개를 돌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홍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지방’의 주민·농민 나아가 농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서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성은 성장모델을 지속하는 경우에는 인간성과 관련해 얻을 것이 없다.”(39쪽) 나는 인용한 문장에서 ‘여성’의 자리에 어떤 이름을 넣어도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마리아 미즈/갈무리/2만 9000원.

저자는 자본주의의 발달과정과 그 실체를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며 분석한다. 우리는 흔히 지금의 경제구조가 기술의 발달에 따른 잉여의 발생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잉여를 시장을 통해 거래하며 경제가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대륙과 대륙으로 커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본주의의 시작에 폭력이 있다고 말한다. 즉, 기술발달로 인해 ‘잉여’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폭력을 바탕으로 훔치고 약탈한 물품이 ‘잉여’로 규정되면서 교역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폭력에 의한 약탈이 고착화돼 식민지가 되고, 이 체계가 구조화되고 현대화된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마리아 미즈는 착취를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강탈하여 무언가를 취하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의 희생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것”(197쪽)이라고 정의내리며 착취(식민화)야말로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착취를 위와 같이 정의하는 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를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를 분업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해왔다. 성별노동분업, 국제노동분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자본주의는 압도적인 폭력을 앞세워 우리를 분리시키고, 구분짓고, 단절시킨 후 서열을 매기고 분업이라는 이름으로 착취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과개발과 저개발은 한 쌍이며, 서울과 농촌(지방), 남성의 임금노동과 여성의 가사노동은 한 쌍이다. 즉, “일부의 ‘인간화’는 다른 이들의 ‘비인간화를 의미하고, 일부의 발전은 다른 쪽의 추락을 의미하며. 일부의 부는 다른 이들의 빈곤을 의미한다”(178쪽)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착취가 구조화되는 과정을 가부장제를 통해 설명한다. 자본주의 발달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여성에 대한 착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식민지 이전 시대의 사례분석을 통해 여성에 대한 착취의 의미를 확장한다. 여성의 노동은 최초에 자신과 자식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 시작됐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최초의 식량공급자, 매일매일의 생계책임자, 최초의 농부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즉, ‘여성의 노동’은 ‘사회적 생산’이었으며 ‘당면한 삶을 위한 생산(자급노동)’이었던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누군가를 착취하기 위해서는 폭력뿐만 아니라 자율성의 바탕을 파괴시켜야 한다는 것이며, 그 수단 중 하나가 ‘자급노동에 대한 무시’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외적으로는 ‘폭력(군사력)’, 내적으로는 ‘자급노동에 대한 무시’를 통해 착취를 구조화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가치가 훼손된 것은 ‘가사노동’과 ‘농사’이다. 

지금도 자본주의는 ‘자연’, ‘여성’, ‘농촌’, ‘제3세계’라는 ‘식민지’를 착취함으로써 지속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삶을 위한 생산(노동), 즉 자급노동의 가치는 퇴색돼왔다. 그리고 특정 ‘식민지’의 불만이 커지면 다른 ‘식민지’의 착취를 늘려 그 과실을 나눠줌으로써 불만을 잠재워왔다. 가사노동에 대한 여성의 불만이 커지면, 제3세계 외국인노동자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농촌에서 어려움을 토로하면 새로운 기계나 농약, 화학비료를 처방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난해 10월 내포신도시에는 홍북읍 인구 3만 명 돌파에 환호하는 현수막이 나부꼈다. 하지만 다른 읍면의 현실은 어땠을까. 지난 10년 동안 홍북읍을 제외한 나머지 10개 읍면은 해마다 인구가 줄었다. 2023년은 지난 10년 중 홍북읍을 제외한 읍면의 인구가 최소치를 기록한 해이다. 이래도 홍북읍 인구 3만 명 돌파에 마냥 기뻐해야 할까? 홍북읍의 발전과 나머지 10개 읍면의 축소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마찬가지로 서울의 과집중과 농촌소멸은 한 쌍이다. 선진국의 풍요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빈곤은 한 쌍이다. 모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착취해 성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착취의 시스템에 반대하는 운동을 페미니즘이라 정의한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남성) 권력 엘리트를 다른 (여성) 엘리트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엘리트도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며 살아가지 않는, 서열이 없고, 중앙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운동이다.”(107쪽)

지금부터라도 현재의 잘못된 시스템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길 망설인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착취에도 반대한다면 모두 페미니스트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계는 공고하다. 하지만 그 옛날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위치와 그들의 몰락을 생각해보라. 현실주의를 가장한 패배주의는 ‘자멸적’이며 ‘비현실적’이다. 다시 말한다. “전 세계 여성·농민·노동자·농촌 주민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는 기생충의 성장을 통해 어떤 인간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457쪽) 소비의 영역에서, 생산의 영역에서 우리는 착취를 거부하고 자율권을 되찾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쉬운 자율권의 획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가장 오랜 기간, 그리고 가장 광범위한 범위에서 착취가 이뤄진 곳, 바로 ‘논밭’과 ‘가사노동’의 영역에서부터 우리는 저항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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