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의미하는 ‘설’, 설날의 유래와 기원을 더듬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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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의미하는 ‘설’, 설날의 유래와 기원을 더듬어 보니…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4.02.0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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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일보·홍주신문 발행인 한관우<br>

설 명절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전통 명절 중 하나다. 한국인들에게는 가족·친지들과 함께 보내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설 명절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설은 한 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새로운 해가 밝아오는 것은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의미하며, 한국인들은 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설은 가족·친지들과 함께 모여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놀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명절이다. 

이런 만큼 설 명절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설은 고려 시대부터 시작돼 현재까지 이어져 온 우리의 전통이며,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명절이다. 설의 역사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에는 설을 지내기 위해 많은 의식과 풍습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설 전날에는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운 옷을 입고, 차례를 지내는 등의 준비를 했다. 설 첫날에는 가족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떡국을 먹는 등의 의식을 가졌다. 또한, 설 첫날에는 친척들을 만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는 등의 풍습도 있었다.

설날은 우리나라 명절 중 추석과 함께 2대 명절의 하나다. 음력으로 1월 1일, 양력으로는 보통 1월 말이나 2월 초·중순 경에 다가온다. 설날은 보통 구정, 정월 초하루, 또는 음력설로 불리며, 한자어로는 신일(愼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 원일(元日) 등으로도 불린다.
태음력을 쓰던 우리 민족에게 설은 최대의 명절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여에서 자체적인 역법을 시행했다’는 기록도 있고, 신라에서도 ‘설날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수서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원일, 즉 새해 첫날에 서로 문안을 드리고 왕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군신들을 격려하며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과 책계왕이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고, 시조 동명왕에게 정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고려와 조선에서도 항상 중요 명절에 ‘설날’이 꼭 들어가 있다. 

특히 정월 초하루인 설날부터 정월 보름까지 각종 세시풍속과 함께하는 축제가 이어졌고, 그 기간에는 ‘빚 독촉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런데, 서양식 개혁이 시작된 갑오개혁(1894)과 을미개혁(1895)이 시행되면서 없어졌다. 또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도 일본인들처럼 양력 1월 1일을 명절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음력설을 쇠는 경우에는 엄벌에 처한다”는 공포를 내리기도 했다. 실제 일제는 음력설을 쇠러 가거나 세뱃길을 방해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몰래몰래 음력설을 쇠었고, 일제가 끝날 때까지 음력설을 완전히 폐지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1895년 을미개혁기에 도입한 양력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공식적인 ‘설’로 인정을 받은 반면, 음력설은 ‘구정’이라 부르며 천대를 받았다. 당시 양력설과 음력설을 함께 쇠는 것을 ‘이중과세(二重過歲)’라고 해서 양력설을 쇠도록 장려했으나 전통을 중시하는 민간에서는 음력설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도 양력 1월 1일만 인정,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우리의 전통 명절인 음력설을 쇠면서 사실상 두 번의 설을 보냈다. 

“설은 음력설이 진짜”라는 전통이 워낙 강했기 때문인지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구정’을 ‘농어민의 날’이라는 국경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양력설은 그대로 두되 음력설 하루를 쉬게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아예 음력설을 쇠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가 모두 양력을 쓰는데 우리만 음력을 되살려 국제화에 역행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결국 정부는 바로 “구정을 공휴일로 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고 여러 가지 낭비가 뒤따른다”며 백지화했다. 이어 음력설을 못 쇠게 하는 압력의 강도가 높아졌다. 197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설날 근무 기강을 다잡는다”며 설날 중앙부서 연두순시를 하거나 기관장회의를 열게 했다. 1975년 국무회의에서는 “정부가 이중과세를 하지 않도록 국민을 지도·계몽하는 방침에 전혀 변화가 없다”고 강조하고 “공무원부터 솔선수범해 두 번 설을 쇠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1978년 최규하 총리는 “구정 날 공무원이 정시에 출퇴근을 하는지, 근무 중 자리를 뜨지는 않는지 철저히 감시하라”며 ‘집안단속’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설날’ 명칭에 대한 다양한 논의 결과 음력 1월 1일을 공휴일인 ‘민속의 날’로 지정했고, 마침내 노태우정권 때인 1989년 2월 ‘민속의 날’을 다시 ‘설날’이라는 명칭으로 회복했으며, 지금과 같이 ‘설날 3일의 공휴일’ 지정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이는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을 되살리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귀성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8년 12월 김대중 정권에 들어와서 ‘IMF 이후의 경제난 타개’와 ‘이중과세’의 낭비를 막기 위해 정부는 “공휴일이 너무 많다”며 양력설 연휴를 하루로 축소시켰다. 당시 양력설 연휴의 축소를 두고, 생산성 향상을 이유로 ‘1999년부터 시행하자’는 경제단체와 익년도 달력을 이미 제작한 인쇄업계의 ‘2000년부터 시행하자’는 주장이 동시에 제기됐고, 논의 결과 1999년부터 양력설 연휴를 축소, 현행과 같이 자리 잡게 됐다.

최근에는 사회가 급변하면서 우리나라의 동방예의지국이 방향을 잃고, 도덕과 윤리, 법치가 모호하게 변화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신은 관계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궤변만 늘어놓는 사회가 돼가고 있다. 경제는 물론 먹고사는 문제까지 공짜만을 원하는 사회로 변질되고 있다. 농경사회와 산업화 사회 때만 해도 살만했으며, 젊은이들은 윤리, 도덕을 지키며 꿈과 희망이 있었고, 가는 곳마다 인심이 후해 서로 나누며 오손도손 잘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정보화 사회, 스마트시대로 전환하면서,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을 보는 순간 핸드폰을 보면서 놀려고 하며, 가정에서도 자녀들의 인성보다는 지식이 우선이 되고, 명절이 돼도 가족·친지들과 함께 보내는 소중한 시간보다는 해외로 여행을 가는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세태로 변모해 버렸다. 설 명절에도 세배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직도 설날은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2대 명절의 하나다. 새해에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인간미를 풍부하게 느끼는 한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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