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약자를 돌본다
상태바
페미니즘이 약자를 돌본다
  • 이동호 <홍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
  • 승인 2024.02.22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한기를 맞아 홍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무기력에 대한 책을 읽었다. 

무기력을 하나의 단어로 통칭하지만 신체, 감정, 정신 각각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무기력을 작게 쪼개면 맞설 수 있다. 우울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몸이 약해질 때,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때 우울감이 2주 이상 지속되며, 일상생활을 방해할 때 정신의학적으로 ‘우울증’이라고 한다. 우울감이 우울증으로 고착화되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우울감이 우울증이 되기 이전에 이를 해소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관계다. 

그런데 막상 우울한 일이 생겨서 털어놓고 싶어도 이게 의외로 어렵다. 바쁜 사람 붙잡고 한탄하는 것 같아 연락하기도 미안하다. 나의 치부를 믿고 털어놓을 수 있다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가벼운 일조차 이런데, 더 깊고 끝없는 일은 얼마나 무거울까. 지난 1월, 대구에서 치매 환자인 80대 아버지와 이를 간병하던 50대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다. 아들은 15년째 아버지를 간병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은 현장에 있던 유서를 토대로 아버지를 간병하던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사적 간병비는 10조 원으로 추정된다. ‘간병 살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추혜인/심플라이프/1만 6000원.

남편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아무리 맞은 사람은 죄가 없고 때린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의사에게 곧바로 털어놓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한 번 맞은 것이 아니라 상습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는 더 그렇다. 누구라도 자신이 하찮게 취급받고 있다고 인정하고 밝히기는 쉽지 않다. 진료실에서 환자들은 많은 것을 숨긴다. … 그것은 신뢰에 대한 것이었다.(105쪽)

신뢰는 관계가 있을 때 생긴다. 공공교통이 빈약한 농촌에서는 거동이 어려워지는 순간, 고립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겨울철 고관절 골절 노인이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더라도 집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 요양병원으로 입소(실제 고관절 환자의 약 20%가 입소)하게 된다. 노인요양시설 입소자 3/4은 입소까지는 불필요하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이는 국가 재정은 물론 지역 공동체에도 손해다. 이전의 개인의 ‘효’에 의지했던 패러다임과 다른 새로운 돌봄 공공정책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우리 비혼 페미니스트들은 앞으로 계속 살 곳을 찾아 이 동네로 들어왔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족이 없어도, 서로 돌보고 돌봄 받으며 페미니스트로서 나이 들고 죽을 수 있기를 원하며 함께 만들고자 했던 것이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이다.(93쪽)

홍성의료사협에서 운영하는 ‘우리동네의원’은 올해부터 홍성군과 함께 거동이 어려운 장기요양 수급자(1~4 등급자)에게 재택의료팀(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이 직접 가정으로 찾아가는 정기 방문 의료서비스인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는 장기요양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을 시행한다. 주치의가 있다고 무병장수하는 것은 아니다. 눈물 찔끔 나거나 가슴 졸이는 이야기가 넘치는 넷플릭스 시대 화려한 서사에 익숙한 우리에게 책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밋밋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동네주치의가 재택의료 ‘팀’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방문 진료가 소멸 예정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지역을 바꾸는 상상력을 키워줄 힌트가 줄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