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융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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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서기,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융합하다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3.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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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전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이응노는 서울의 해강 김규진 선생뿐만 아니라 호남지역 화단의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勉, 1906~1948)과 효산 이광열(曉山 李光烈, 1885~1966)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실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응노의 호(號) 죽사(竹史)를 지어주신 스승 해강 선생이 1933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별세한 이후로 이들과의 교류관계는 더욱 깊어졌을 것이며, 이후 규원 정병조 선생으로부터 호 고암(顧庵)을 받는 것에도 이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응노는 폭넓은 문화예술의 흐름을 수용하고 있던 여러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문화적 환경의 차이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스승 문하에서 배운 문인화는 1930년대 당시의 미의식에 부합하지도 않았으며, 일본화 모방의 유행 현상을 따르는 것도 탐탁치 않았다. 
 

고암 이응노 <공주산성> 48x60cm, 1940년, 한지 위에 수묵채색. 소장=대전시립미술관

결국 이응노는 자신이 직접 동시대의 새로운 미의식을 수용하여 전통의 부흥을 찾는 길을 선택하였고, 일본 유학을 감행한다. 더불어 당시 인지도가 높았던 일본 소재 미술대학이 아닌 사설 강습소인 가와바타 미술학교, 혼고회화연구소나 개인화실인 마츠바야시 게이게츠의 덴코 화숙에서 서양화와 일본화를 연구했다. 특히 마츠바야시 게이게츠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았고, 사생을 충실하게 하되, 형식과 기교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사실주의적 회화양식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응노는 1935년경부터 1945년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의적 문인화 양식에서 사실주의 경향의 신남화 양식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고,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생’을 충실하게 연습한다. 특히 옛 서울의 한강풍경, 궁궐, 교회, 채석장을 비롯 고향 홍성, 부여, 공주, 태안 등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사생 연습을 했다. 

이때의 그림은 사실적 표현과 기하학적 원근법, 부감법과 파노라마적 시선 등 동서양 회화의 특성이 융합한 산수-풍경화였다. 서양식 풍경화의 공간구성의 주된 기하학적 원근법과 선으로 대상의 형태를 구축하는 방식, 동양회화의 상하좌우로 끝없이 펼쳐지는 부감법과 파노라마적 시선이 결합하는 새로운 특징을 지닌다.

서양회화의 기하학적 원근법, 일점투시원근법을 기반으로 한 화면의 공간구성과 사실주의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 <공주산성>을 통해 이응노의 유학시기 동안의 회화적 성취를 가늠할 수 있다. 작품의 오른쪽 하단의 제문 ‘경진년 10월 공주산성, 고암 이응노’로 보아 1940년 10월경 고향인 홍성에 내려와 주변 지역인 예산, 공주, 서산 등을 답사하며 완성한 작품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왼편의 나무 숲이 우거진 공간과 오른편으로 구불구불 S자 곡선의 작은 길로 공간을 구획했다. 왼편에 위치한 나무들은 압도적인 크기로 화면에 등장하며 빽빽한 숲의 느낌을 주고, 나무들은 짙은 먹으로 나무의 골격을 형성하고 메마른 붓질로는 울긋불긋한 가을 낙엽의 정취를 담아냈다. 

오른편의 구불구불한 길들은 층층이 이어지며 언덕 위로 향하고 길의 좌우로는 무성한 풀들은 이리저리 얽히고 설히며 무성하게 피어있다. 그리고 화면 왼쪽 사선과 오른쪽 사선이 만나는 상단의 하얀 공간에는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고개를 넘어오고 있다. 전통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하학적 공간구성과 사실적인 나무와 풀, 흙의 색 등 표현을 기반으로 현실적인 시골 풍경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와 서정성이 풍부하게 들어나는 작품이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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