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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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3.12.27 11: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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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문명적으로 오랜 세월 진화해 왔으나 더 이상의 생물학적 진화의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동물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살다 죽게 된다는 시간표가 단단히 DNA속에 규정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것이 변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개구리처럼 올챙이의 모습으로 태어났다가 뒷다리가 쑥 빠져 나오는 그런 변신의 과정은 없을 것이다. 성체로서 태어나 그대로 성장하도록 게놈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봇이 인간을 대신할지는 모르지만 로봇의 존재이유가 그 것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밀림의 사자나 호랑이 같은 짐승들은 사냥을 하고 고기를 먹다 죽게 될 것이고 그 패턴은 변화 없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적 자기동일성 이외에, 사유하는 힘에 의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을 발전․누증해 왔고 이것을 받아들여 향유하는 사람들의 삶은 짐승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야만이 아닌 문명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짐승들의 행태와 거리두기의 역사이다. 짐승들은 유전자에 노예처럼 본능적으로 얽매여 있는 존재임에 비하여 인간은 학습에 의하여 이제까지 축적된 문명을 압축하여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을 변형하여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다. 타자기를 사용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컴퓨터를 배워 그 이상의 무한한 효과를 거둬들일 수 있고 그 결과는 예전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문명은 유동하여 타 문명과 결합하기도 하고 새로 탄생한 문명은 다른 문명과 또 화학반응을 일으킬 잠재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이 타 문명에 전해지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타 문명을 학습하여 나의 문명을 개선하려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것이 없을 때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나라의 문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나라 고유의 문화가 있을 터이지만 유럽의 근대성(modernity)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소외당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출구를 찾아보려는 노력의 징표였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상정하여 인간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를 꿈꾸어 보았고 토마스 홉스는 인간끼리의 폭력이 없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개인의 폭력을 국가에 위탁시켜 보고자 했다. 루소도 자신과 세상에 처절하게 불화하면서 평등한 삶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싶어 했고 마르크스는 노동의 착취가 없는 함께 잘사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 공산사회를 꿈꾸어 보았다. 이렇게 촉수가 예민한 삶들은 모두 강제와 소외가 없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는 흔적들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인류의 역사는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 나약한 자들을 길들이기 위한 광기의 역사였다고 지적한다. 광기의 역사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체제에 '자발적 복종'이 아니라 길 위에 놓인 장애물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세상은 잘 나갔던 지난 시절, 공간적으로 멋진 다른 곳, 초월적인 환상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하나 둘 제거할 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애물을 피해가고 싶어 하고 강력한 힘(조직, 정치)에 굴복하거나 동조하여 나팔수가 되기도 한다. 조선 선조 때 홍성민은 '촉견폐일설(蜀犬吠日說)'이라는 글에서 촉나라에서는 흐리고 비오는 날이 많아 해가 뜨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여 개가 해를 보고 짖는다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간신들이 당리당략과 사리사욕, 무능으로 해를 보고 짖어댈 때에는 그 피폐가 이루 말 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뿐아니라 조그만 조직에서도 야만과 문명 사이를 분주히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난 한 해, 해(日)를 보고 짖는(吠) 견(犬)의 역할을 하지 않았는지 조심스럽다.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억압과 소외가 없는 문명의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해 가고 있건만 남쪽에서는 '안녕하지 못하다'는 신음소리, 강경진압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북쪽에서는 독재자의 부릅뜬 야만의 눈빛과 죽은 독재자의 동상 앞에서 그의 삶이 영생했으면 좋겠다는 북녘의 슬픈 얼굴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억압과 강제는 오래가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장애물을 내가 손수 치울 때 유토피아는 저 멀리서 손짓을 할 것이다. 그것이 문명의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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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정 2014-01-02 21:34:51
생활이 점점 더 버거움에 헉 소리가 납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하구요
그 장애물들을 어찌 치워야 할지...아득합니다.
올한해도 좋은글 자주 읽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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