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척화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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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척화비 앞에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4.01.0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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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28>

 


길은 가까운 곳에 있다.
헛되이 먼 곳에서
길을 찾아나서야 하겠는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길
그 시작, 처음에서
끝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밖에서 찾아 나서지 말고
안에서 지펴야 뜨거운 것
예언의 시대는 사라졌다고
속임을 당하고
눈물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불은 빛의 시작이다
불씨에 집착하지 말고
그렇다고 몸을 돌려, 멀리
잉걸불만 바라볼 일이 아니다
오, 어리석은 자는
가까운 길도 에두른다

미래가 끔찍하면 할수록
그만큼 실현이 가능해진다
모든 예언들이 가치를 잃어가고
스스로 길을 외면하여 갈 때
삶은 죽음의 시작이 된다
오동나무는 봉황만을 기다린다
*잉걸불: 활짝 피어 이글이글한 숯불

척화비(斥和碑)는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전국의 주요도시에 일제히 세운 비석을 말한다.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기 나라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시작되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척화비이다.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산141에 위치하고 있는 이 척화비는 충남 문화재자료 제163호로, 화강암으로 되어있으며, 귀부와 이수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로서 넓적한 자연암석 위에 비몸을 꽂아놓은 모습이다. 서울의 종로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도시에 세워졌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일제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으나, 충남에는 신창척화비(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297. 충남 문화재 자료 제 236호)와 예산척화비(예산군 대흥면) 등 3기가 남아 있어 구한말 당시의 상황과 쇄국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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