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흑백영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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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트]흑백영화 2
  • 윤여문<작곡가, 청운대 교수>
  • 승인 2014.01.0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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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꿈을 꾸었다. 나는 ‘히죽히죽’ 메마른 눈물을 흘린다.
아직 네가 죽을 때가 아니야. 그 해 늦가을, 문득 이른 아침의 냄새가 나는 새파란 살풀이 무당 얼굴이 생각난다. 무표정의 그 얼굴. 차가운 법당 한 복판에서 음악에 맞춰 너풀거리는 그 새하얀 춤. 저 여자가 내 슬픔을 알 것인가. 모든 것이 재가 되어지고 으스러진 그 해골을 싸안고 집으로 돌아왔던 날, 그 날, 내 인생의 절반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그 무당의 표정 없는 얼굴처럼 나는 늙어 버린 것이다.
식탁에서 거대한 산 같은 아버지의 눈물은 차라리 절망이었다. 그는 망연히 흐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짐짓 모른 체 하였고 나를 의식 하신 듯, “그것이 순서였다면 가야 했겠지요.”
질곡의 세월을 지낸 후의 한 숨 같은 탄식이 더욱 가슴 아프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수저를 가만히 내려놓고 담배 몇 개비와 함께 공원으로 나갔다. 유난히도 햇볕이 따가웠던 그 경악의 아침. 그 파열하는 아침. 나는 공원 한 복판에서 신음 같은 원망을 중얼거린다.
“누나, 사랑해” 나는 누이들 사이에 누워서 그녀의 가슴 철렁하게 여린 어깨를 다독인다. “걱정 마.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누이는 말이 없었고 그저 무표정한 눈으로 내려 본다. 나는 그녀의 단발머리 소녀시절이 생생하다. 가지런한 생머리의 시절도 기억한다. 정확히 반을 나누어 양 옆으로 맨 그 정갈한 모습. 그녀가 그 긴 생머리를 파마 했을 때, 그녀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억을 묻어두었던 누이의 수많은 과거 사진을 아버지 냄새가 배어 있는 농장에서 모조리 태워 버렸고 모든 것은 순식간에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는 저편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그 불길을 쳐다보았고 어머니는 부러 바쁘다. 나는 그네들의 눈길이 무겁다. 몰래 숨겨온 누이의 사진 몇 장과 함께 그날 내가 가졌던 것은 지독한 악몽. 아아. 그 죽음보다 무서운 그 악몽.
“누나, 퇴원하면 이제부터 설거지는 내가 맡겠다”는 말을 했을 때 누이는 십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처럼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 말이 그녀에게는 확정된 죽음이었지 않았을까. 일본에서의 치료가 아무 진전이 없었음에도, 강원도에서의 요양 생활의 무료함에서도 그녀는 담담했다. 유일한 죽음의 암시는 ‘설거지는 내가 맡겠다.’는 준비되지 못한 그 한마디.
나는 온 몸이 비틀려 있었다. 양 팔은 결박되어 있었고 입은 지나치게 벌어져 있었다.
견딜 수 없는 두통이 도사리는 그 몽환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눈앞에 예고 없이 다가온 부담스러운 현실이 낯설다. 팔을 뻗어보았으나 어림없다. 가득 고인 눈물조차 닦아 내지 못한 나에게 대흥동 동시상영 극장 같은 어둠이 희미하게 밝아 온다. 몸이 떨리고 ’푸울석’ 나는 주저앉는다.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나약하다. 면도날같이 시끄러운 염병할 두통.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아비규환. 모든 것은 중얼거린다. 지금까지 한 번도 기억한 적 없었던, 저 편 너머의 과거들이 하나씩 차례 지켜 다가오는 것은 엄연한 아픔이고 당혹이다. “어이구, 이이런 자아시익두…” 아버지의 노력이 눈에 보인다. 가정된 평안. “사아내 자아식이 그으깐 이일루, 워언…” 그는 늘 따뜻한 내 아버지다.
다시 한 번 지리산 소나무가 되어야겠다. 여름날 그 시원한 냄새를 가진 소나무가 되어야겠다. “퇴원하면 함께 재밌게 놀자”는 내 지키지 못 한 약속. 그 절벽에서 시원한 비바람 맞으며 누이와 미친 듯이 재밌게 놀아야겠다. 빗속에서 어머니 연시 드시는 모습 이야기 하면서 아버지의 오줌소리에 깔깔 댔듯이, 무임승차 했던 나를 바라보았던 그 당황처럼, 미국에는 나와 똑 같은 이름과 얼굴을 가진 이가 있다는 그 너스레를 가지고 재밌게 놀아야겠다.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을 누이가 눈에 선하다. 내 누이…, 내 누이….
<내가 대신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밤 길, 내가 뒤에서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을 때, 당신이 놀랬던 것은 필시 노려보았던 그 신경질적인 어둠의 미래가 아니었을까요. 고양이가 갓 난 아이처럼 울 때, 그것이 흐르는 세월일 줄 누가 알기나 했을까요. 하지만 미안했습니다. 정말 미안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 카스텔라와 초콜릿 우유처럼 미안했습니다.>
사나운 꿈을 꾸었다. 힘에 겹지만 내일 다시 만나고 싶은 그 사나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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