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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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본새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6.11.1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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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만 하다가 모처럼 모내기 하려니께 워뗘? 힘들지?” 써레질 하다말고 새참 먹으러 나오며 형구에게 한마디 건네는 춘길형의 말투는 듣는이에게 힘을 주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허리 부러지는줄 알았슈! 아구구구!” 형구도 즈이 아버지 저리가랄 정도로 능청스럽게 말을 받으며 겸연쩍은지 즈이 아버지 쪽을 흘깃 바라본다. “원기! 말 잘하는 소진장 아는감?” 바쁜 농사철에 이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더구나 초등학교 근처도 안가본 양반이 웬일로 2000여 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대 유세객 소진.장의를 들먹이지?

“어여 밥이나 자셔!” 죽은깻말이나 얼굴에 붙이고 다니는 납작코 충근이 어머니 소라실댁이 춘길 형의 등짝을 때리는지 토닥이는지 철썩 갈기며 하는 말이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들도 모르게 소라실댁 쪽으로 향한다. 얼굴은 못났어도 잘생긴 미소와 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는 어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아줌니! 술부텀 한잔 주! 나도 말이나 잘 혀서 이놈의 고달픈 농삿일 때려치려구 그려!”

“말 잘하는 놈 치고 믿을 놈 읍땨! 쟈!” 막걸리 사발을 디밀며 소라실댁은 다정한 맛과 끈끈한 매력으로 다시 또 남정네들의 이목을 잡아당긴다. “아이구 나 죽네! 엄니! 나 좀 살려줘유!” 막걸리 사발을 받으며 춘길 형이 한마디 하자, 좌중은 박장대소를 한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인물 잘나고 소리 잘하기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던 일등 신람감 선구씨가 쫓아다니는 처녀들 다 뿌리치고 처녓적의 소라실댁 즉 길숙양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가 딱지를 맞고 말다니 참으로 놀랠 노자가 아닌가. 하여 가슴에 사랑의 열불이나서 속이 타던 선구씨가 마침내 밥 짓던 죽은 깨 박사에게로 달려가 부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길숙이! 나 좀 살려줘!” 했다나! 선구씨가 못난 길숙양을 아내로 맞게 된 것은 진정성의 승리였다. 깨꼼보 소라실댁이 가는 곳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까닭은 티 없이 환한 웃음과 어딘가 성적 매력이 묻어나는 목소리도 목소리려니와 남을 내 식구인양 믿으며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인 말본새, 즉 말투 때문이었다.

‘말’이란 나와 남을 이어주는 단순한 가교가 아니다. 없어서는 안 되고 지나치면 독이 되는 오묘한 선약이라고나 할까? 오죽하면 독일의 위대한 작가 괴테가 60년을 쏟아 부어 완성한 명작 ‘파우스트’의 첫 머리에 “태초에 말(logos)이 있었다” 라고 썼겠는가?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 는 것도 삶 속에서 수없이 목격하게 되는 진실이고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TV며 라디오 같은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살림하는 재미보다 마실다니기 좋아하는 여자는 대체로 말이 많고, 하필 얘기하며 놀자판일때면 꼭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져서, 열어놓은 장독에 빗물이 흥건히 고이기 일쑤이니, 그런 날들이 되풀이된 끝에 장이 썩어서 쓴 맛이 나게 마련인 것이다. 요즘의 국난을 보건대, 인간의 말투(말본새)가 유난히 심각하게 생각된다. 

들은 건 많고, 배운 건 많은데 마음 공부가 덜 된 많은 이들, 특히나 위정자들, 고위 공무원들, 종교지도자들, 각급 학교 선생님들은 지금 우리가 처한 국가적인 대 위난 앞에서 한 마디 말을 할때마다, 한번 자신부터 다스릴 때이기도 하다고 본다. ‘어린왕자’가 들려주는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도 한 방책이리라. ‘명심보감’이나 몽테뉴의 ‘수상록’도 좋겠고, 정치가들은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나 엘리아스 카네티의 명저 ‘군중과 권력’을 읽으며 틈날 때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의 마지막 구절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란 말을 그 중에서도 국민에 의한 이란 말을 가슴깊이 새겨야 마땅할 것이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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