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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의 창가에서

무술년을 보내는 새벽녘 눈을 뜨면서 며칠 전 모임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 새날이 되었는데 지난 생각이 꼬리를 문다는 것은 오늘 할 일을 향해 정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머리에서는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과는 달리 꼬리를 물고 생각들이 달려온다. 그래, 부끄러움을 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부끄러움을 마땅히 알고 고치고 노력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조언도 충고도 애정이 없으면 못한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내 마음이 다친다는 것은 나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나에 대한 평가를 한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의 평가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생이 반추라면 인간은 반추의 동물인가? 반추는 과거 명사이면서 현재인 지금을 잠시라도 과거의 늪으로 빠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적으로 지난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데도 지난 일이 충격이었나 보다. 혼돈의 세계에 빠져 있다 망각의 바다에 완전히 빠져 모두 잊기를 희망했는데도 허무하게 새벽이 되자 기억이 살아났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바라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잘못하면 변명, 구실 등으로 또 다른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일 자체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사랑도 지나치면 애증이 되고, 관심도 지나치면 간섭이 된다. 애교도 지나치면 교태가 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누군가 나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져 준 사람에게 기도와 수행의 한 방편으로 조언을 해 준 일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 실망, 실수, 무엇을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자기반성 뒤에 자기 위안으로 누군가를 향한 말조차 불필요한 것들 아닌가? 삶에서 말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본다. 나의 자존감을 위해 가끔 읽어 보는 글귀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애오잠병서(愛惡箴幷序) 이달충의 글에 나오는 글이다.

人而人吾則可喜也(인이인오칙가희야) :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나는 기뻐할 일이요. 不人而不人吾則亦可喜也(불인이불인오칙역가희야) : 사람이 아닌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나는 또한 기뻐할 일이며人而不人吾則可懼也(인이불인오칙가구야) :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나는 두려워할 일이요不人而人吾則亦可懼也(불인이인오칙역가구야) : 사람 아닌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또한 두려워할 일이다. 喜與懼當審其人(희여구당심기인) :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吾不人吾之人之人不人如何耳(오불인오지인지인불인여하이) : 마땅히 나를 사람이라 하고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인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닌지를 살필 일이다.

‘애오잠병서’에 나오는 몇 줄 글, 누가 말 하는가에 흔들리지 말고 살아라. 이보다 나를 위로 하는 글이 있는가? 말한 사람의 눈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나 진실 되게 살고 있는지 먼저 헤아려라.

누가 자신에 대해서 평가하면 화부터 내지 말고 천천히 돌아봐라. 그리고 말한 사람의 수준이 다양한 면에서 본받을 것이 많고, 살아온 과정에서 흠결이 없다면 인정해라.

살다보면 문학이든, 사람이든, 꽃이든, 사물이든 주관적인 평가가 누군가한테 상처가 될 때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함부로 하는 평가절하에 연연하지는 마라. 이 세상에는 비난(非難)받아야 할 일을 칭찬(稱讚)하는 사람들도 있고, 칭찬해야 할 일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반추의 창가에 하얀 눈발이 내리기 시작한다.

아! 새해다. 모든 것을 다 녹여 물로 승화 시키고 어느 그릇에나 수용이 될 수 있는 물이 되려면 얼마나 더 노력을 해야 할까.

유선자 <수필가·칼럼위원>

유선자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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