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75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백마강에는 낙화암 -15 백마강에는 낙화암 -15 무엇인지 묵직한 것이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보자기는 얼마쯤 썩었으나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속의 물건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유리는 썩어가고 있는 보자기를 풀어 헤쳤다. 그 때 번쩍 빛나는 것이 있었는데 자루가 있는 한 토막의 은장도였다.“바로 이것이구나!”유리는 기쁜 마음으로 은장도 토막을 들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소나무 기둥이 서 있는 일곱 모로 깎아 세운 주춧돌 밑에서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상세하게 말씀드렸다.“그것이다. 바로 그거다. 장하다. 내 아들 유리야!”어머니 예씨 부인은 유리를 부둥켜안고 기쁜 눈물을 흘렸다 교육 | 한지윤 | 2019-10-30 09:00 백마강에는 낙화암 -14 백마강에는 낙화암 -14 “그것이 어려운 일이란 말이다. 가다가 붙들리면 옥에 갇히고 죽음을 당하니까!”“그러니까, 몰래 도망치잔 말이예요!”“그렇게 해도 너의 아버질 만나기가 어려워!”“왜요?”“우리나라에서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듯이 그 나라에서도 다른 나라 사람을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까, 그렇지.”“제가 고구려 임금의 아들이라고 그러죠. 뭐?”“누가 그걸 믿느냐 말이다.”“어머니가 말씀하시면 되지 않아요.”“너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누가 내 말을 믿어주겠니!”“그럼, 우리는 영영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나요?”“그렇지는 교육 | 한지윤 | 2019-10-23 09:00 백마강에는 낙화암-13 백마강에는 낙화암-13 “저희들이 돌을 던지지 않았어요.”우선 돌을 던지지 않은 것부터 변명을 하게 되었다.“그럼, 누가 돌을 던졌단 말이냐?”“저기, 저 애가요.”옥지는 유리가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저 녀석이?”그 여자는 옥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더니 더욱 성이 난 듯,“옳지, 바로 네 녀석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애비 없는 후레자식 아니고야 아무리 장난이 심하기로서니 어른이 이고 가는 물동이에 돌을 던질 리가 있겠느냐?”하고, 유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잘못한 것 없이 욕을 먹는 것도 분했고,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을 들었을 때는 더욱 분 교육 | 한지윤 | 2019-10-10 13:48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12> 처음에는 활과 같이 맞출 곳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 달 이상 돌팔매질을 하는 동안, 유리는 돌팔매질이 익숙하게 되었다.처음에는 큰 것을, 다음에는 작은 것을 맞췄다. 처음에는 마음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활 쏘는 것과 같이 재미가 났다.나뭇가지에 앉은 까치를 맞춰 보았다. 맞는 것이었다.백발백중은 아니지만 열 번에 일곱 여덟 번은 맞출 수 있었다.까치보다 작은 참새에게도 던져보았다. 몇 번은 참새도 맞는 것이었다. 유리는 점점 자신감을 얻어 손에 맞는 돌만 있으면 참새도 맞출 수가 있었다.유리는 친구들을 찾아갔다. 유리와 친한 옥지, 구추, 도조를 찾아갔다.“나 돌로 까치를 잡을 수 있다!”유리는 친구에게 말했다.“거짓말.”친구들은 유리의 말을 교육 | 한지윤 | 2019-10-09 09:06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11> “유리야.”예씨 부인은 밖에서 활을 가지고 노는 유리를 불렀다.“네.”“넌 내가 이르는 말을 잊었느냐?”“잊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어찌 거리에서 활을 쏘느냐?”“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에 쏘아 본 것입니다.”“그러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어쩌지?”“활을 쏘고 싶어서 그랬어요. 어머니 앞으로는 더욱 조심 하겠어요.”“정 활이 쏘고 싶으면 집안에서 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서 쏘거라. 네가 활을 잘 쏜다는 소문이 나면 큰 일이 난단 말이다.”“왜요?”“그건 지금 들어도 너는 모른다. 네가 크면 저절로 그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니 그런 줄만 알고, 엄마 말을 명심해야 된다.”예씨 부인은 유리의 활 솜씨가 주몽을 닮은 것을 더없는 기쁨으로 교육 | 한지윤 | 2019-10-02 09:06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10> 대소 형제와 그들의 심복 부하가 주몽의 재주를 시기하여 음해를 잡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소는 나를 그냥 두고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 보오.”“가신다면 어디로······”“어디라고 단정할 수는 없소. 다만 동남쪽을 향하여 내려가 볼 생각이오.”“그럼, 지금 가시오면 언제나 뵈오리까?”“몸을 피해 도망가는 지금 처지로는 그 때가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어느 곳에라도 정착하여 당신과 어머님을 모셔갈 생각이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구려.”예씨 부인의 두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여보, 너무 슬퍼하지 마오. 어머님과 당신을 두고 가는 이 마음이야 오죽하리오.”“네-. 알았어요.”“다시 만날 때의 기쁨을 생각하고 교육 | 한지윤 | 2019-09-25 09:08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9> 그것도 부족했음인지 다듬이질을 해서 옷에 맵시를 내어 자식들에게 입혔던 이 모두가 어머니들의 솜씨요, 창작이요, 문화인 것이다.이와 같이 어머니의 대명사로 불리워지던 물의 문화는 그시대에 백제의 국모 소서노가 한수 변에 도읍을 정하고 이민족에게 아리랑의 문화를 남겨주는 결과를 낳았다.서울은 이조시대 왕성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건재하다. 지금은 세계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며 또 선진국의 수도로 웅비하려는 서울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백제의 어머니, 아니 겨레의 어머니가 골라잡은 터전이었다.이러한 역사를 상고할 때 이 겨레의 어머니들의 은혜를 하늘이라고, 또 땅이라 한들 어찌 족함이 있으랴! 그러나 어머니들이 물에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룩한 것이 아리랑이지만 그 유래의 알쏭달쏭함이 또한 아리 교육 | 한지윤 | 2019-09-11 09:04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8> 백제는 처음에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고, 또 국모가 죽은 후 한산 밑으로 도성을 옮겼다. 이와 같이 도성을 정함은 국모 소서노의 지혜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고구려의 구신이요, 신임 있는 열 명의 신하를 소서노가 이끌고 남으로 남하했던 것이다. 물론 백제에는 온조왕도 있었고 열 명의 신하도 있었다. 그러나 온조왕은 아직 20세 전후요, 경륜이 적으므로 국모 소서노는 비록 수렴청정(垂簾聽政)은 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국사(國事)의 결정은 왕도 어머니의 청고에 따랐던 것이다. 따라서 한수 변에 도읍을 정한 것은 소서노의 뜻이라 하겠다.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물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가 형성됐다. 그러므로 물의 문화를 아는 것은, 그 시대의 소서노를 비롯한 모든 어머니들의 생활을 아는 척도가 될 것이다. 교육 | 한지윤 | 2019-09-04 09:01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7> 그러므로 자식이 성년이 될 기초는 거의 어머니가 책임지고 있으므로 어머니의 교육여하는 성년 된 후의 성패(成敗) 까지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농경생활에서는 주로 어머니가 모든 가사 일을 돌보는 것이다. 그 후 아이가 성장하면 아버지를 따라서 사회생활에 관한 일들을 배우고 한 사회의 성원으로 활동하게 된다.그러므로 고대에는 사회에 나가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 곧 성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였다.김유신 장군은 집에서는 어머니 교육을 받고 아버지를 따라서 전쟁의 통치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난승이라는 스승을 만났다. 그 밖에 한 고조도 이와 비슷한 환경으로서 장자방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 통일국가인 한나라를 창업할 수 있었다.이와 같은 농경을 위주로 하는 고대의 사회 교육 | 한지윤 | 2019-08-28 09:09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6> 따라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가 없고, 또 그 아내는 두 지아비를 섬기면 불순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지탄을 받았던 것이다. 그 예를 신라 처용의 노래에서 찾을 수 있다.서울 밝은 달에밤들이 노닐다가들어가서 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더라.둘은 내 것인데둘은 뉘 것 이뇨본디는 내 것 이다마는앗은 것을 어찌 할꼬이 노래의 유래는 신라 헌강왕때 급간 벼슬을 하던 처용랑이 달밤을 즐기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부인이 다른 남자와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물론 글에는 그 외간 남자를 역신이라 했지만 그 시대의 사상은 처용랑이 부인을 관대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당시에는 여자의 순결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무릇, 상고 때는 사람의 수가 교육 | 한지윤 | 2019-08-21 09:05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5> 고대의 기록에는 ‘선능’이란 구절이 많다. 즉, 병사에 있어서도 선능한 장수, 선능한 병술, 선능한 용병술이라 했고 정사(政事)에서도 선능이란 낱말이 많음을 볼 수가 있다.‘선능’이란 글자 그대로 가장 좋은 것을 능숙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유도치하의 선(善)은 착한 것으로 통한다. 웃어른에게 복종하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복종을 잘하면 이것을 선이라 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선이란 충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슬기와 최고의 지혜로 봉사하는 것을 선이라 한다. 또 능(能)이라는 것은 그 행함에 있어서 구김새 없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이른다. 최고로 좋은 것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습관화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들이 슬기롭고 좋은 교육을 계 교육 | 한지윤 | 2019-08-14 09:02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4> 하기야 가뭄에 콩 나듯 어떻게 해서 벼슬을 얻었던 예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관에서 징발하는 부역, 병사 등에는 빠짐없이 선발되니 농자의 지위도 분망(奔忙)했던 것이리라!이처럼 분망했던 농경사회에서는 남녀유별이라는 엄한 교육이 있었으면서도 농사에 여인들의 손길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족의 아내나 관헌의 아내가 어찌 호미를 잡고 평민의 남녀와 어울려 김을 매고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으랴.이 같은 풍속은 유도(儒道) 정치가 도입되는 고려조 이래 이조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졌던 풍토로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역할도 이에 따라 생활환경이 크게 변화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권세가와 호족(豪族)의 가문이라 하더라도 여자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고 이름 석 자나 쓸 줄 알고 교육 | 한지윤 | 2019-08-07 09:07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3> 그러자 그 시대의 혼란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종사(宗社)와 가문(家門)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곤경에까지 이르렀다.그리하여 그녀는 천하의 영걸인 주몽왕에게 접근하여 결혼을 했다. 이리하여 소서노는 고구려왕의 총애를 받는 왕비가 되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걸으면서도 그녀는 지극한 모성애로서 개국(開國)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백제를 건국하여 13년 동안이나 아들의 나라를 도왔다. 그런 후 온조왕 13년 3월 왕모(王母) 소서노는 일생을 마쳤다. 이에 온조왕과 중신들은 왕모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4년 후(기원전 2년) 4월에 국모의 예로서 묘사를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이는 동명성 왕모 유화 태후의 묘사를 세운 이래 두 번째이며, 그녀는 국모의 예우를 받은 위대한 여성이었다. 그러므로 소 교육 | 한지윤 | 2019-07-31 09:05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2> 첫째로 그 때의 풍속이나 나라의 규범은 왕후장상유종이라 하여 왕의 혈통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었다. 비류도 졸본왕의 혈통이라고는 하지만 집권왕의 혈통이 아니므로 지방 방백으로서 장수(將帥)에 해당된다.그러므로 비록 비류가 장자이더라도 왕위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온조를 세울 수도 없는 것이 주몽왕에게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장수의 혈통을 가지면 그 집안 대대로 장수를 계승하여 병사를 배워야 했다. 따라서 주몽왕은 소서노와 이십여년을 살면서도 후사를 계승할 태자를 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몽왕은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생각하여 그가 죽을 무렵에 예씨를 왕후로 삼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던 것이다.둘째로 장자인 비류를 왕위에 세우지 않고 유리를 왕위에 세운 그 이유는 무엇인 교육 | 한지윤 | 2019-07-24 09:08 백마강에는 낙화암 백마강에는 낙화암 <1> ①백제의 건국 전설소서노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구구한 말들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 등에 전하는 것을 보면 졸본 부여왕의 딸, 또는 월군녀(越郡女)라 기록되어 있고,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우대에게 시집을 가서 비류와 온조 두 형제를 낳고 주몽과 결혼했다는 것이다.소서노는 졸본 부여 우대의 처로서 우대가 죽은 후 주몽을 도와서 고구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여걸임에는 틀림없다.당시의 형세로 보아 졸본 부여는 부여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압수의 이남 땅과 압수의 북변이며 요동까지도 장악하였던 강대한 나라였다.그러나 당시엔 강대한 진나라가 중원에 통일국가를 세우고 동침을 개시하여 동이의 제국을 위협할 시기인 까닭에 소서노는 우대왕이 죽고 나라를 의지할 수 없는 실정 교육 | 한지윤 | 2019-07-17 09:10 처음처음이전이전1234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