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상의 발걸음-고암 이응노
상태바
군상의 발걸음-고암 이응노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4.03.06 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35>

 


아무리
험한 길이래도
군상(群像)의 발걸음에는
작은 소리 하나
머물지 않는다
갈 적에는 오는 걸
올 적에는 가는 걸
생각이나 걱정하지 않는다
붓을 잡은 마음
한 곳에 머물게 하면
사물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모든 색깔에는
한 점 티끌 같은 소리
들려올 까닭이 없는 것
나의 사랑, 나의 조국, 나의 핏줄들
그냥 이름만으로 외우는
가상을 떠나 실상을 생각하면
아파오는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다
청정한 마음을 비울 때마다
철철 넘치듯 흘러오는
무거운 함성 그대로
침묵으로 삼아
발걸음하는 군상들에게는
허튼 소리 하나 없다 


1904년 1월 12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李應魯)의 호는 고암(顧庵)·죽사(竹士). 1923년 서울로 올라와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묵죽墨竹〉을 출품해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에게 사사했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 상을 받은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다. 1946년 배렴·장우성·김영기·조중현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1948년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있었다. 특히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해 묵화·서예 등을 가르쳐 3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967년에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 주선으로 석방,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국내화단과 단절, 스위스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히 활동했다.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납치음모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국내와는 완전 단절되었다. 1989년 호암 갤러리에서 초대전이 열리던 중 1989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예술의 대가들이 묻힌 파리시립 펠 라세스 묘지에 묻혔다. 한편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한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은 2011년 11월 8일 개관했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 소재한 이응노 생가 기념관은 건축계 및 건축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의 새로운 답사지로 각광받으며 답사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칼럼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