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적 이성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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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적 이성을 넘어서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4.11.13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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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우리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웠다. 학자들은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의 의미를 모더니즘에 대한 연장(延長) 또는 단절(斷切)로 파악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쪽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갑자기 서구에서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철학 뿐 아니라 건축,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 전 분야에 걸쳐 소개 되고 있어서 KBS1에서는 90년대 초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뜨거웠던 포스트모니즘 논쟁은 이제 우리사회의 관심에서 멀리 사라졌고, 영국의 런던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특별 전시회(2011,9 ~ 2012,1)를 열기도 하였으니 포스트모더니즘이 사망하여 박물관 속으로 사라졌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 셈이다. 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짧은 삶을 살다 마감한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용어는 모더니즘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 다방면에 걸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단정 짓기 어렵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90년대까지 문화 전반의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운동이라는 점에 학자들은 대개 동의한다. 모더니즘의 한계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 즉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서구세계는 제시 하였지만, 우리사회는 아직 모더니즘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의 현실 문제라 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구축된 새로운 세상보기가 아니었기에 격한 논쟁을 일으켰지만 갑자기 우리사회에서 시들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사회가 모더니즘의 한계를 드러낸 포스트모던한 세계로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이론, 사상으로서 퇴조 하였지만 우리사회에서도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티’는 숙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세계 전체를 하나의 통일적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모더니즘의 ‘거대서사(grand narratives)’를 포스트모더니즘은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세상을 획일적으로 파악하려는 보편적 사유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역사가 발전하면 인류는 점점 더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과학과 기술은 우리가 꿈꿔온 유토피아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불신한다. 세상은 점점 자유롭지 않으며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성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서사보다는 보다는 다양한 ‘작은 이야기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에서 탈피하여 아담하고 예쁜 집을 짓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획일적 거대 담론 보다는 미시적이고 파편적인 권력기제들에 관심을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의 작업들은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스스로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모더니즘의 자율적 주체(subject)가 아니라 주체 역시 사회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의 죽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홈쇼핑 상품 중에서 어느 것을 살까 고민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홈쇼핑의 배후에 작동하는 후기자본주의의 권력에 수동적으로 상품을 선택할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한계, 변화된 조건을 진단하고 분석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새로운 시대의 지표와 이념을 제공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어떤 주체도 해체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실패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현대인들에게 사적인 자유만을 보장하고 공적으로는 저항의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지속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했다. ‘거대한 힘’에 대한 저항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이해하고 가볍게 예능화하는 심미적(aesthetic) 이성 취향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변화시키려 했던 전복(顚覆)의 힘을 상실하고 하나의 지적 유령(知的 幽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본주의를 타파하려는 공산주의가 그 전복의 힘을 잃었을 때 유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듯이 작은 조직이나 커다란 국가도 그 조직의 근본적 병폐를 드러내는 사건(events), 세월호와 같은 사건을 예능적, 심미적으로만 바라볼 뿐 그에 대한 행동화, 부조리의 전복과 대안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조직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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