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淸泠浦)에 부는 바람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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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청령포(淸泠浦)에 부는 바람Ⅱ
  • 글·그림 / 오천 이 환 영
  • 승인 2016.02.1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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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시인 이달(10)
▲ 영월도중(寧越道中)Ⅱ, 청령포 관음송, 105×60cm, 한지에 수묵담채, 2015.

1457년 윤 6월22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은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 윤 6월28일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그해 9월 금성대군 유(瑜)가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에 17세 꽃다운 나이로 영월 동헌 객사 관풍헌에서 승하한다.
단종(端宗, 1452~1455)의 마지막에 관한 기록은 ‘자결’이 아닌 사사(賜死)가 일반적 판단이다.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엎드려 울자 공생(貢生, 관가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목을 졸랐다고 기록한다.
청령포 강둑에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을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었다고 한다.
세조의 개혁정치에도 불구하고 계유정난을 비롯한 일련의 행위는 “유교정치의 법도에 어긋났으며”(한영우), “명분없는 쿠데타요 공자가 「춘추」에서 주륙(誅戮)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판한 찬탈(簒奪)에 지나지 않았다.”(이덕일)
우리의 시인 이달(李達)은 ‘영월가는 길’(寧越道中) 3 ·4구(句)에서
“봄 바람에 들려오는 두견울음 괴롭고, 서녁해에 노릉은 차갑구나”
(東風蜀魄苦 西日魯陵寒, 동풍촉백고 서일노릉한)
조선의 왕이 서인(庶人)의 신분으로 영월 땅에 묻힌 노릉(단종릉)을 보며 잘못된 역사의 비통함을 두견 울음에 담아 읊는다.
‘시대(時代)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다산(茶山)의 시론이다.
이달(李達)은, 임진년 전란의 한 가운데서 80여 년 전 조선의 어두운 역사가 저무는 햇볕, 차가운 무덤과 청령포를 휘감는 거센 강바람 속에 혼령처럼 떠돌고 있음을 보고 있다.
필자는 청령포 수림지 중앙, 수령 육백년의 거대한 관음송을 그려 시의(詩意)와 함께 그가 기억하고 있을 비정한 역사와 단종의 여한을 대신한다.
청령포(淸泠浦)는, 인간의 허망한 욕망이 연출한 광기 어린 역사로 인하여 자손 만대와 민족의 역사 위에 세운 정신적 금표(禁標)로서 지금도 마땅히 고통스럽다.

 

 

 

 

동양화가, 운사회장
글·그림 / 오천 이 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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