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사회와 ‘악의 평범성’
상태바
공정사회와 ‘악의 평범성’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1.02 0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해 아침에, 사람들은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각자의 소원을 빌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어렵고 막막한 환경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경험한 빅터 프랭클(Vicktor Frankl·정신과 의사)은 인간은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한나 아렌트). 인간에게 있어 ‘새로 시작할 수 능력’은 힘들고 답답한 현실을 깨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능력이다. 훌륭한 개인과 좋은 사회는 이것을 받아줄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지나온 일 년을 회고해 보면 그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지 않았다. 연 초에 빌었던 많은 소원들이 실패했거나 미완성으로 끝났고, 이루지 못한 계획을 다시 세울 수 있을지 망설여지게 했다. 우리 사회의 기반을 뒤 흔들었던 정치적 사건들은 서로를 백안시(白眼視)하게 했고, 지금도 주말이면 청와대 문전에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다.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국가의 운명 앞에서도 국회의사당에서는 내편의 집권을 위해서 목숨을 걸 태세다. 정치권은 내 진영, 네 진영을 나눠, 죽기 살기로 삿대질하며 상대를 부정한다.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볼멘소리와 한숨소리는 여전하고, 국가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늘어나도 다음 선거를 위해 공금을 물 쓰듯 한다.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기업들은 이 땅을 떠날 채비를 한다.

잘 돼가고 있는 분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사회는 다양한 경고음을 보내게 마련이다. 그 신호를 무시할 때 사회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그러한 사회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사는 것은 현명한 일일까? 사회의 공적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니까, 정치가가 하는 일이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일까? 개인의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히틀러 밑에서 악행을 저질렀던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평범하고 모범적이며 가정적인 남자였지만, 그의 생각 없는 행위가 수많은 유대인을 사형장으로 내몰았다. 그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생각 없이’,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성실히 잘못된 명령을 수행할 때 얼마나 큰 비극이 저질러질 수 있는지를 조명했다. 그녀는 이런 사유(思惟)하지 않는 삶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아이히만 같은 삶은 합리적, 이성적 공동체를 파괴한다. 생각 없이 저지르는 평범한 악은 인간의 마음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표면에 있다. 진정한 악과 사이코패스는 오히려 드물 수 있다.

아이히만 같은 경우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면 우리 사회 모두가 잘못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않고 내편, 우리 편을 위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는 공동체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우리 각자의 안에 있는 아이히만’을 내 보내지 않고 부르짖는 정의와 공정사회, ‘나라를 위해서’라는 구호는 우리의 아이히만을 덮는 둔사(遁辭)에 불과할 것이다.

새해에는 나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평범한 악이 썩 물러나길 기원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독자 여러분께 새해의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길 소망해본다.

김상구<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칼럼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