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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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살이
  • 김옥선 칼럼위원
  • 승인 2020.06.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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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을살이를 처음 시작한 곳은 전라북도 진안군이다. 20가구가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의 빈집을 얻어 살았다.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고 읍내로 직장을 다니며 마당 텃밭에 푸성귀를 조금 심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 텃밭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잡초들도 없고 무언가 바뀌었는데 초보 농사라 의심만 할 뿐이었다. 며칠 뒤 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뒷짐을 지며 마당에 들어섰다.
 
“내가 며칠 전에 제초했는데 깨끗허지?”
제초제도 사용하지 않고 무농약으로 키워보겠다는 나름의 원대한 결심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할머니는 몸빼바지 주머니에서 끝도 없이 콩을 꺼내며 밭에 심고 남는 것은 밥에 넣어 먹으라고 한다. 그저 감사한 마음에 냉큼 받아들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마을에 한 할아버지가 고등학생 손자와 함께 단둘이 살고 있었다. 손자는 등교하려면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마을에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가구다. 할아버지가 더듬더듬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출근하는 길에 우리 손자 좀 학교 근처에 세워주면 안 될까?”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나가는 길이고 잠시 들렸다 가면 그만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퇴근하고 들어오니 현관 앞에 퇴비 5개가 떡 하니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져다 놓으신 것이다. 돈을 주기 어려운 형편이니 미안한 마음에 그러신 것이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하지만 마을살이를 생각할 때 그 당시 상황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가끔은 이웃과 술도 마시며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토로해야 하며, 혼자 일할 수 없으니 서로에게 도움을 청해 일하기도 해야 한다. 이 모두 마을 이웃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만났던 한 귀농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을에서는 도무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갑자기 훅 들어와 이런저런 일을 간섭하는데 너무 당황스럽다’고 말이다. 그런데 시골에서 익명성을 보장받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마을에서 살던 당시 내가 살던 집과 옆집은 분명 대문이 따로 있다. 그러나 대문만 따로 있지 담이 없어 그 집이 그 집이다. 옆집 아주머니는 친정어머니와 남편과 살고 있다. 어렸을 때 사고로 한쪽 팔이 불구가 됐다. 불편한 한쪽 팔을 대신해 왼쪽 팔이 열일을 한다. 부지런히 할 수 있는 만큼 농사를 짓지만 농한기에는 심심하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우리 집에 수시로 들락거린다. ‘뭐 해?’라는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접어두고 후다닥 현관을 연다. 아주머니와 뭐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오이지는 어떻게 무쳐 먹냐, 우리 엄마 때문에 못 살겠다, 따뜻해지면 고사리 끊으러 가자 등등이다. 아주머니가 수시로 벌컥벌컥 문을 열었지만 사실 조금은 귀찮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런 속내를 비치면 아주머니가 서운할 것 같아 드러내지는 않았다. 계약 기간이 끝나 이사를 하게 됐다. 아주머니와 작별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을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이런저런 마을 내 활동들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이다. 마을공동체를 왜 복원시키려고 할까?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마을 어르신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살기는 좋아졌지만 인정은 없다’고 말이다. 

정(情)의 사전적 의미는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다. 마을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를 측은해하고, 보살피며, 감동하고, 배려해주며 살아가는 일, 진정한 마을살이의 시작이다.

 

김옥선<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팀장·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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