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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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7.2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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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진종일 걷노라니
      산  하나 지나면 또 산 하나 푸르구나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어찌 육신에 얽매이랴
      도는 본래 이름이 없나니 어찌 빌려 이루랴
      밤이슬 채 마르기 전에 산새들 지저귀고
      봄바람 쉬임없는 속에 들꽃이 환히 피었구나
      단장 짚고 돌아가매 일천의 묏부리 고요하고
      푸른 벼랑에 밤안개 어지러이 이누나

<무제>라는 제목으로 효종대의 문학평론가 홍만종의 《소화시평》에 실린 김시습의 시이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요, 호는 동방의 (우뚝선) 봉우리라는 뜻의 동봉, 맑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의미의 청한(자),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인간이라는 자조적인 뜻을 지닌 췌세옹, 매화나무와 달을 사랑하는 집의 주인이라고 불리운 매월당 등 다양하다. 58년의 파란만장한 삶 대부분을 승녀로 살아간 그의 법명은 설산, 즉 히말라야를 뜻하는 눈 덮힌 산봉우리(설잠)이다. 

위의 시에 대한 현 묵자 홍만종의 감상평은 딱 한 줄이다: ‘도를 깨친자가 아니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라?, 과연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인간은 훌륭한 분들이나 저명한 사람들의 말이면 무조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습성이 있다. 필자는 불세출의 조숙한 천재로 태어나 삼촌이 어린조카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종내는 죽음으로 까지 내몰았던 어지러운 시대를 충절로써 맞서 살아간 매월당 김시습의 처절한 삶 그러나 끝내는 찬란하게 마무리가 된 위대한 인생행로를 한없이 찬양한다. 

존중돼야 할 가치들이 패대기 당하거나 잘 간직돼야 마땅한 미풍양속 따위가 눈깜짝할 사이에 내동댕이 쳐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요즘의 세태를 보면서 문득 올바름,정의, 인간다움 같은 가치를 지키고자 전도양양한 삶을 송두리째 내던졌던 선현들의 생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맨 먼저 떠오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아니! 그가 이렇게나 박복한 사람이었다니! 그토록 고고하고 강철 같았던 매월당이 출사를 해보려고 갖은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을 줄이야! 태어나서 8개월 만에 문자를 알아봤고, 두 돌 때 시를 지었으며 다섯 살 때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아 시를 짓고 비단 50필을 받았던 매월당.
 
그의 전도양양했던 인생길은 15세 때 모친의 사망으로 크게 흔들린다. 모친의 3년상을 마친 김시습은 정신을 추스르고 불교 사상을 배우고저 송광사에 가게 되는데, 위의 시는 그때 그에게 불교를 가르쳤던 준상인이라는 승려에게 그가 써 보낸 20수의 시 가운데 8번째 시이다. 그 당시 매월당의 나이는 18세였으니, 위의 시를 다시 읽어보면 도를 얻은 뒷날의 설잠스님의 모습을 떠올리기 보다는 번뇌가 많은 한 젊은 영혼이 가슴에 가득 찬 번뇌의 불길에서 벗어나고자 무작정 산길을 걷고 또 걷는 두타행이 떠오른다. 

좋은 글을 찾고 평가하기에 필생을 바친 홍만종조차도 매월당이 18세에 지은 시를 보고, 온갖 풍파를 겪고 난 뒤 해탈의 경지에 지은  시쯤으로 생각한 듯하다. 감성은 뛰어난데 마음은 여린 매월당에게 휘몰아친 두 번째 충격파는 과거 낙방과 어머니 대신 그를 붙잡아줬던 외할머니의 죽음이다. 이어서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자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를 죽이고, 만조백관을 궁궐로 불러들여 책사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 등 단종보위 세력을 살해한 계유정난이다. 매월달의 나이 19세였던 1453년 참극에 이어 2년 뒤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끝나며 다시금 피바람이 몰아치고 단종을 죽음으로 내몬다. 매월당 김시습은 숨을 쉴 수조차 없는 정신적인 충격 속에서도 사지가 찢겨 죽어가던 사육신들의 의연한 충절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시신을 혼자서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었다. 매월당은 키는 작고 다소 뚱뚱했으며 잘생기지 못했다.

성격도 차가왔고 예절 따위는 무시 한 채 얽매이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조야가 주목한 시대의 걸출한 인걸이었지만. 피칠갑으로 조정을 장악한 무리들도 그를 꺼리고 기개와 충절의 화신이었던 매월당 또한 무뢰배들과 한패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매월당은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사흘간 통곡한 뒤 책을 불살라버리고 방랑길에 오른다. 가슴 속에 치미는 분노의 불길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뒷날에 그가 가마타고 지나가던 영의정 정창손에게 “야 이놈아! 그만 좀 해먹어라!”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산속에 들어가서는 백성들이 걱정되어 관료가 돼볼까 하고, 중이면서 결혼도 세 번씩이나 한 김시습, 얼핏 보면 속물 같지만 매우 솔직했던 그 인품을 후세인들은 참으로 사랑했다. 

그 어떤 경우든 간에 사람답게 살고자 했고 지켜야 할 것들을 목숨 걸고 지켰기 때문에 매월당의 파란만장한 삶은 만인의 사표가 되었으리라. 사실 그가 혼인을 세 번씩이나 한 까닭은 매번 부인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엊그제 보슬비가 내리던 날 부여 홍산의 무량사에서 뵌 그의 영정은 평안해보였다. 치열하지만 바르게 살다간 사람의 말년은 어떻게 은은하게 빛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원기 <청운대학교 교수·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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