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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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5.20 08:3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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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함은 우리 안에 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자긍심이며, 폭풍우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나 스스로 잣대라고 굳은 결심만 한다면 늘 현재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나쁜 습관도 단숨에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번에 한 가지씩이라도 버려야 하는 악습이다. 하물며 빈곤과 불평등 같은 사회 문제를 개선하고,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정치는 어떤가. 정치에는 반드시 책임이 뒷받침돼야 한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정치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정치인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라고 했다. 의미심장하다. 최소한 서로 예쁜 길로 가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소유와 자유가 흔들리는 불안한 대한민국은 전체주의인가 민주주의인가 간혹 좀 헷갈린다. 뒤통수에 자꾸만 마음이 쓰여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내가 지금 또 그런다고 하는 ‘자각’에서 시작한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가면으로 사는 낮의 삶과 민얼굴로 사는 밤의 삶에 의한 교차 반복이 아닐까. “사람은 항상 자신의 현 위치를 자신이 처한 환경 탓으로 돌린다. 나는 환경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은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찾은 사람이다. 만약 그런 환경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런 환경을 만든다”라고 조지 버나드 쇼는 《워런 부인의 직업》에서 말하고 있다. 어부는 그물을 던지지만 고기만 넘겨줄 뿐 바다는 항상 그물 밖에 있다. 불평은 자기 신뢰가 없는 사람의 피난처에 불과하며, 자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디까지나 자기 사랑이다. 

인생은 어느 나이대나 다 살만하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고기라도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고 네 절기도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있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무한경쟁이다. 경쟁자를 누르고 꺾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대평가가 만연된 사회이다. 우리가 최초로 무릎을 깨고 콧등에 상처를 입었던 것은 겸손하게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시절이 아니라, 두 발로 걸어 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면서 시작된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기억한다.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억새의 가벼운 몸짓처럼, 우리도 가벼워져야 한다. 과거에선 속상한 아쉬움도 느끼지만, 미래에서 찰진 희망을 보는 거다. 허상을 좇지 말고 가는 것은 유수와 같이 가게 하는 거다. 나라의 근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연출적인 쇼도 이제 화살 시위에 실어 떠나보내는 거다. 

공자가 스스로 ‘섰다’라고 말한 것도 서른 살 때고, 에디슨은 30대의 나이에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다. 예수도 그렇다. 그는 서른에 침례를 받고 비로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세계 명작 소설의 대부분도 그 작가의 30대에 이룬 성과인 경우가 많다. 특히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그렇다. 그들에게 아득하고 막막한 공허의 날이 왜 없었겠는가. 지금, 날카롭던 서슬 다 갈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남루를 걸친 채 섰을지라도 우리 슬퍼하지 말자. 그들이 일구다 간 빈자리에, 아무것도 펼칠 수 없는 무능의 뜨락을 뒤돌아보며 떠나는 이들이, 공허한 마음에 가슴 아린 이들이 우리뿐이겠는가.

그렇더라도 주도적인 삶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자책감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한시름이다. 한시름은 미래, 자책감은 과거에 대한 일이지만, 둘 다 현재의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나 실패한 일에 대해 자책감에 빠져 현재를 낭비하는 것은 유죄다. 현재는 미래에 대해 집착이 아니라 충실하게 살아내야 할 때인 거다. 

혹자는 전문가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지만, 우리 시대의 얽히고설킨 사실을 편집하는 능력, 전혀 다른 분야 사이에 생각의 다리를 놓는 깜냥은 현재에서 벗어나 미래를 통찰하는 으뜸 솜씨다. 디지털·컴퓨터 혁명으로 ‘이미지의 범람’이라는 말이 생겨난 지도 꽤 오래됐다. 식물학의 아버지 칼 폰 린네는 양귀비 열매 속에 2만 개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밝혔고, 에디슨의 1100여 개 발명품은 20세기 현대인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밖 인류의 도전과 성과는 새삼스럽다.

참된 삶이란 예속이 아니라 자유이고, 안주가 아니라 도전인 거다. 매미에게 일곱 해 동안의 침묵과 극기를 보상하고도 남을 이레 동안의 찬란한 절정의 순간이 있다. 하물며 우리에게 그런 눈부신 순간이 왜 없겠는가. 종달새 같은 황홀한 비상의 기회가 왜 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든 가벼운 것은 우리 곁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꽃향기처럼, 물안개같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세상의 모든 위선과 비겁함에 맞서 싸우는 게 진짜 우리 속내일까. 아니라면 어떻게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지. 발터 벤야민은 “한밤중 길을 걸을 때 중요한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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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onhu 2021-05-23 11:48:20
잘 읽었습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 해야 함을 매번 느끼지만, 항상 실행이 어려운거 같네요 허허...

2021-05-22 22:37:58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CW 2021-05-22 13:11:50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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