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의 역사인물을 다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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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역사인물을 다시보자
  • 조남민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7.0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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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삼산(三山) 이태중 선생의 ‘청백비 건립 제막식’이 열렸다. 이태중(李台重, 1694~1756)은 결성현 삼산리(현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개편으로 현재는 보령에 속한 곳이지만 당시는 결성현 관할의 홍성 땅이었다.

이태중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삼산(三山)이다. 17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0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 후로는 황해도 관찰사·평안도 관찰사·예조참판·부제학·호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나 올곧은 성품탓에 바른 소리를 일삼다가 영조의 미움을 사 모진 유배생활을 겪었다. 

그는 일생동안 청백리로 살아왔으며 임종을 앞두고도 ‘빈소와 염습에 비단을 쓰지 말고 신도비도 세우지 말고 봉분도 백성처럼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때문인지 은하면 목현리에 있는 그의 묘소는 아직까지도 단촐하게 남아있다.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홍성 갈산의 오두리 마을에서 진안군수·한성부판관·고성군수를 지낸 김성달과 여성 지식인 이옥재의 사이에서 아홉 자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19세에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 송요화와 혼인해 대전에서 살았다. 친가와 시가 모두 당대 손꼽히는 명문가로 김호연재도 문학수업을 받은 여성 작가였다. 

김호연재는 생애 200여 작품을 남긴 천재 여류 시인이었지만,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과 비교해 작품이나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 드물었다. 김호연재의 시가가 있는 대전 대덕구와 대전 문화계는 김호연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지속적인 발굴을 시도하며 이를 브랜드화하고 있다. 

대덕구는 김호연재 문학상을 제정하고, 대전 문학계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문학가로 김호연재를 기리는 ‘김호연재 여성문화축제’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충남대에서는 김호연재의 영정을 제작하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결성현에서 태어나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165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조참판·형조판서·도승지·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후 숙종 때는 대제학·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국정 전반을 이끌었다. 소론의 거두이며 호는 약천(藥泉)으로 그가 지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가 우리에게 친숙하다. 

홍성 구항면 내현리에는 남구만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으며,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보개산 감투봉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갈산면 와리에 남구만의 선조묘가 있는데 묘비의 글과 글씨를 직접 썼다고 한다. 

남구만의 묘역을 조성해 관광지로 가꾸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그를 ‘불세출의 위인’이라 칭하고 있으며 매년 ‘약천 남구만 신인문학상’을 공모하고 있다. 현재 남구만의 영정은 보물로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홍성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이라 일컬어질 만큼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홍성역사인물축제’를 벌이고 있으며 횟수가 거듭되면서 홍성이 인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한성준 선생을 제외한 최영 장군, 성삼문 선생, 김좌진 장군, 한용운 선사, 이응노 선생 등과 관련된 생가지 또는 기념관을 홍성의 명소로 지정해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또한 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성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계속 발굴하고 연구하며 홍보하는 일은 다소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다. 외지의 많은 사람들이, 홍성사람들은 정작 잘 모르는 인물에 대해, 그 인물이 홍성 출신임을 알고 깜짝 놀라는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 위에 거론한 이태중, 김호연재, 남구만 등이 그런 예에 속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스승이자 소설의 모티프가 된 손곡 이달(李達, 1539~1612, 구항면 황곡리 출생)도 그렇고, 판소리의 효시이며 대가인 최선달(崔先達, 1726~1805, 결성면 성남리 출생), 조선의 5대 명창이며 중고제를 이끈 김창룡(金昌龍, 1872~1943, 결성면 용호리 출생) 도 그렇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남당 한원진 선생, 임득의 장군, 김복한, 이근주, 임한주 선생 등도 마찬가지다. 

홍성이 낳은 위대한 역사문화인물은 수없이 많다. ‘홍성인물문집해설본(홍성문화원 발간, 1998)’에 기록된 사람만 해도 50여 명에 이르고, 홍주역사인물찾기 연구용역보고회(2009년)에서는 100인의 홍주인물이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 고장 홍성의 인물에 대한 삶의 발자취를 찾아내고 이것을 후손에 널리 알려 홍주 정신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것은 당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한성준, 김호연재, 이달, 한원진, 김창룡 등의 생가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조남민 <홍성문화원 사무국장·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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