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제 판소리 명창, 한시로 읊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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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제 판소리 명창, 한시로 읊다〈2〉
  •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 승인 2021.09.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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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신라 화랑도 기원설, 무굿 기원설 등 종래의 설을 존중하면서도 가장 합리적인 설로 고려 말 성행했던 ‘배우희(俳優戱) 놀음’을 꼽았다. 같은 시기에 ‘대광대(大廣大), 소광대’ 하는 말들이 나온 것은 이 배우희 놀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설은 합리적인 가설 차원이 아닌, 문헌 자료의 뒷받침을 어느 정도 갖췄다는 점에서 신뢰도를 보다 높여준다. 판소리의 상한선을 위로 끌어올리는 문제는 판소리의 역사성, 전통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배우희는 이후 유희(儒戲)로 이어지면서 재담과 연극에 소리까지 덧보태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인조 때에 가면 지성인 사회에서 문희연(聞喜宴)이 일반화하기 시작하고 소리광대가 대우를 받게 된다. 

이 때의 ‘소리’가 판소리와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민요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를 ‘서민예술’이라고 못을 박기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있다. 유희나 문희연에서 보듯이 양반 지식층과의 정서적 교감이 꾸준히 있어 왔고, 판소리의 사설과 체계 구성에 지식층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전하는 다섯 마당만 하더라도 고소설을 바탕으로 아(雅)와 속(俗)의 균형을 이루면서 사설과 소리를 갖추게 됐다. 그 이면에 지식층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에서 판소리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754년(영조 30) 봄에 충청도 선비 유진한(柳振漢: 1712∼1791)이 호남 지역을 유람할 때 판소리를 듣고 그 사설을 칠언 200구 장편 한시로 옮겼다. ‘춘향가(春香歌)’라는 제목의 한시다. 이것은 판소리 300년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이루는 대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쯤되면 판소리는 이제 하나의 음악 장르로 확실하게 인식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기반 위에서 체계와 구성이 더욱 정밀해지고 소리에 대한 이론이 속출하는 것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 비춰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승(承)’의 단계를 보자. 순조·헌종의 시기를 거쳐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이 있기 전까지 약 100년은 판소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명창(名唱)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 수가 날로 늘었다. 이른바 전기 8명창, 후기 8명창이 활동했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양반 출신의 비가비 명창이 나올 정도면 판소리의 바탕이 어느 정도 닦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전주에서 대사습(大私習) 놀이가 해마다 열려 명창들의 ‘등용문(登龍門)’ 구실을 했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 시기에 판소리는 외형적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착실하게 내실(內實)을 다져나갔다. 권삼득·정춘풍 등 주로 양반 출신 명창들이 춘향전·심청전·흥보전 등 고소설을 내용으로 사설을 짜거나 정비했고, 그 바탕 위에 음악적 재질이 뛰어난 명창들이 대중의 흥미를 유발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 소리조(調)를 개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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