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패망과 부흥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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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패망과 부흥 ①
  • 전용식 기자
  • 승인 2007.12.2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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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백제에 비(比)하여 문화 면 뿐만 아니라 군사 면에서도 후진국 이어서 많은 압박을 받았고, 만주에서 일어난 고구려로 부터도 심한 압박을 받아왔다.
이 무렵 중국 중원지방을 통일한 당나라 태종은 고구려의 팽창을 걱정학고 이를 막기 위하여, 전조 0나라 역재의 전철을 무릅쓰고, 3차례나 출병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신라의 김춘추(後에 무열왕)는 당으로 건너가 신라를 구원해 주길 원하면서 고구려의 배후 세력인 백제를 먼저 공격할 것을 권하였다.
당 태종은 이를 받아 들였고 약속을 받아 낸 무열왕은 신라로 돌아와 태자 김법민(後에 문무왕)을 대동하고 경기도 이천지방까지 진출 당병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소정방은 12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와 아산만 밖에 있는 덕물도(덕적도)에 기착하면서 이천에 알렸다.
무열왕은 100척에 수군과 태자를 보내어 소정방을 영접하였다.
이때 소정방은 태자에게 작전 계획을 설명하면서 7월 10일을 기하여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의 남쪽 일거지(약 30리 거리)에서 양국의 군대가 합류하여 함께 도성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다.
태자의 보고를 받은 무열왕은 기뻐하면서, 태자에게 이천에 와있는 병력을 거느리고 전선으로 가게하고, 00(경주)에 있는 병력도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김유신장군은 5만 병력을 거느리고 소정방이 지시한 날짜보다 하루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소정방은 백제도성을 공격하면서 신라군의 협조 없이 당 병력만으로 위험한 초전을 치르게 되자 몹시 노하였지만,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있으므로 문제 삼지를 못하고 무사히 넘어갔다.
이천에 머물던 무열왕은 100척 병선의 호위를 받으며 서해를 안면반도 남단에 이르러 홍성군 광천천이 바다로 유입하는 지점인 오천성에 머물면서 부여로 부터의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국사기」 무열왕전에서 남천정을 출발 금돌성에 내려와 머물고...,(본기 태종 7년 6월 왕차 금돌성>라는 내용과, 김유신전에서 대왕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사라지정(사라의 군영)...,<열전 김유신 (中) 태종 7년 6월 대왕 장수, 행거 사라지정> 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돌성"을 이독문으로 풀이하면
「今」은 金(쇠금)이고,
「突」은 돌멩이ㆍ돌막ㆍ石이므로,
금돌맹이ㆍ금돌막ㆍ金石 즉 주변에 금광이 있는 城을 말한다.
홍성 주류성 아래로 흐르는 광천천은 해방 후 까지도 사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유명하며, 광천의 새우젓 저장 굴은 金을 채취한 금광굴을 이용하여 새우젓 보관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무열왕이 사비로부터 승전보를 기다렸다는 사라지정은 마한 사로국의 영역인 광천천의 입구의 오천항(성)에서 광천 독배사이 지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사라지정 이라고 하였다. 
금돌성과 사라지정은 동일한 장소이고, 주류성의 주변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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