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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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 송경섭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10.2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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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아내의 한쪽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홍성 안과 의원에서는 큰 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했다. 서울 전문안과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혈압이 높아서 안구 뒤편 핏줄이 터졌단다. 안구에 직접 주사하는 정말 무서운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내는 안구가 터질까봐 너무 두려워서 떨었다. 주사를 맞기도 전에 혈압이 180을 넘었다. 간호사가 겨우 진정시켰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실명을 피하기 위해서 안구에 주사를 맞았다. 감사하게도 시력을 점차 회복했다.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운 일인가?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시원하고 감사한 일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사물을 구별하는 육신의 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있다. 마음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평화, 행복, 기쁨, 감사 같은 것들이다. 이 눈이 떠져야 사람들과 행복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가 그랬다. 보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나는 내 곁에서 아파하는 가족의 아픔을 보지 못했다. “아빠는 왜 그렇게 말해?”라고 내 딸이 울먹이며 말해줄 때까지 나는 몰랐다. 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도 안 보이면 모른다. 

이웃의 아픔이나 기쁨에 무관심했었다. 옆에 함께 살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의 눈이 감겨서 그렇다. 조그만 관심이면 행복할 수 있었다. 조금만 배려해도 좋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아내와 다투고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내의 고생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가 달라졌다. 쓰레기를 내다 놓는다든지 설거지를 해놓는다든지 하면 아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점차 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본다.

왜 그렇게 꽉 막힌 인생을 살았을까? 마음의 눈이 떠지면 사랑하며 사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행복이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우선 서로를 바라보자. 눈을 맞추는 것부터 해보자. 입맞춤보다 달콤한 것이 눈맞춤이란다. 사실 눈을 마주 바라보는 것이 참 쑥스럽고 어색하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을 포함해서 마음을 전달하는 데에 정말 중요한 것들이 눈으로 전달된다.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말하고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집중해서 바라보자. 내 주변을 지나치거나 외면하지 말고 주목해서 바라보자. 그래야 보인다. 마음으로 보일 때까지 바라보자. 

며칠 전에는 학교 운동장으로 산책을 가다가 이웃집 어르신을 만났다. 내가 이곳에 이사 온 지 5년이 돼가지만 그동안 “안녕하세요?”라는 한마디 이상을 나누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날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번 벼 수확은 잘하셨는지, 소출은 예년만큼 됐는지 등을 여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르신의 마음이 읽히는 것 같았다.

마음의 눈이 열리면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보이면 그 길로 가면 된다. 사랑이 보인다. 아름다움이 보인다. 기쁨이 보인다. 행복이 보인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당연히 영의 눈이 있다. 이 눈이 떠지면 창조주의 마음이 읽혀진다. 공간을 넘어선 넓은 세계가 보인다.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통한다. 우리가 하나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짐승들은 서로 물고 뜯고 힘센 놈이 최고다. 짐승은 영혼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물고 뜯고 죽이고 혼자서 다 차지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늘의 별을 보며 경외심을 가지며,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그 마음에 양심이 있어서 절제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눈이 떠져야 한다. 마음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짐승처럼 산다. 

진심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이다. 그가 창조주를 본 사람이다. 창조주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다. 선악을 넘어 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영의 눈이 떠진 사람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음이 들린다. 시간을 넘어 영원을 보는 사람은 다르다. 

나는 어디까지 보는가? 육신의 눈만으로 살고 있는가? 그럼 나밖에 모르는 인생이다. 육안은 나를 볼 수 없다. 마음의 눈이 떠졌는가? 이웃이 보일 것이다. 영의 눈이 열렸는가? 그럼 나와 이웃이 함께 보인다. 우리가 영원 속에 있고 하나인 것이 보이는가? 창조주가 사랑이신 것이 보이는가?

송경섭 <결성감리교회 목사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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