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건립 논란, 문제는 ‘역사’가 아닌 ‘행정’
상태바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논란, 문제는 ‘역사’가 아닌 ‘행정’
  • 황희재 기자
  • 승인 2021.12.02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이 6m 넘는 탁본 전시할 곳 없다고 5억 원 투입?
7개월 남은 민선7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원형복원 건립 장소로 거론된 광성초등학교(폐교). 민간이 임대해 다음해 3월 고대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원형복원 건립 장소로 거론된 광성초등학교(폐교). 민간이 임대해 다음해 3월 고대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홍성군이 돌연 광개토대왕릉비 건립을 추진해 지역사회에 논란이 일고 있다. 군은 지난달 16일 비공개로 진행된 정책협의회에서 ‘고대사박물관 연계 광개토대왕릉비 원형복원 건립’ 사업을 설명하며 다음해 본예산(안)에 5억 5000만 원의 원형복원 건립비용을 포함시켜 군의회에 제출했다. 

네 면에 걸쳐 177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높이 6.4m, 너비 1.5m가량의 광개토대왕릉비를 복원해 건립하려는 장소는 갈산면에 있는 구 광성초등학교 부지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홍성 출신 B교수가 고대사박물관 개관을 추진하고 있는 곳이다.

익명을 요구한 군 관계자는 “지역 출신 대학교수가 부지를 임대해 올해부터 공사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B교수가 중국에서 발굴한 각종 유물들과 함께 가져온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을 전시하기 위해 군수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길이가 6m가 넘는 탁본을 전시할 공간이 마땅치 않자 차라리 제대로 된 복제비를 건립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군청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한 지역신문사를 통해 “실물 크기로 광개토대왕릉비를 설치해 고대사 연구와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자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며 “비문에 기재된 홍성의 옛 지명을 관광객들에게 홍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군 관계자가 설명한 비문에 기재된 홍성의 옛 지명은 결성면 금곡리 일원(분이야라성 추정), 장곡면 가송리 일원(산나성 추정), 홍성읍 구룡리 일원(고모루성 추정)을 의미하며, 일부 학자들은 이 3곳을 두고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백제의 성이 있던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태신 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장은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는 갑작스런 사업 추진에 대한 이의제기는 이해가 된다”면서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돼 있는 산나성이 조명되면 장곡면에 있는 백제부흥전쟁의 유적지인 주류성도 고증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홍성지방이 백제문화권에 속해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 유적인 광개토대왕릉비 건립을 반대하기보다 이 지역이 마한세력의 중추부였고 후에 백제에 흡수된 것,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린 것, 홍성이 백제부흥전쟁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기억해야한다”며 “광개토대왕릉비 건립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 속에도 현재 홍성 지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알릴 수 있어 기대효과가 크다”고 덧붙였다. 

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장은 “학계에서도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지명의 위치고증이 완벽히 이뤄지지 않았고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서로 주장하고 있는 단계”라며 “최소한 학술세미나라도 거치고 난 후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을 때 건립을 추진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요즘 박물관에서는 현대적인 첨단 전시기법이 많이 사용되는데,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릉비 복제비를 급하게 세우는 것보다 관람객들의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터치스크린이나 디지털 영상기법 등을 활용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소개하는 방법이 더욱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홍성읍 주민 A씨는 “주민들의 여론도 들어보지 않고 개인이 운영하는 박물관에 갑자기 군비를 들여 복제비 건립을 추진하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형평성을 따지자면 앞으로 홍성에서는 개인이 박물관을 개관할 때마다 군비를 들여 뭔가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개탄했다.

역사학적인 연계성과 타당성을 떠나 군정에 대한 군민들의 신뢰는 최근 충남도 감사위원회의 종합감사에서 기관경고를 받은 것에 이어 이번 논란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다음해 지방선거와 군수 교체를 앞두고 있는 군은 특정 사업에는 필요 이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각종 분야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곳곳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195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야구선수 요기 베라(1925~2015)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