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번역하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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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번역하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 〈3〉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8.2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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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예술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시를 쓴다”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하며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는 말도 남긴다. 

일본인이 패터슨에게 남긴 말은 일상 속의 새로움, 익숙한 것의 낯섦, 그 깨달음과 예술적 각성의 순간을 함께 나누자는 제안으로 읽힐 수 있다. 일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면 다르게 보이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부분도 볼 수 있다는 금언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일상에서 예술이 탄생한다는 것은 창작이 일상적 삶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지각 자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속에서 래퍼가 부르는 노래의 한 소절인 “관념이 아닌 사물로”가 잘 예거하듯이 일상 속의 예술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탐구를 목표로 한다. 

<패터슨>이 보여주는 시인의 공적 자리는 그가 일상이 그리는 순환적 궤도에 덮쳐오는 사건들과 목소리에 감각을 열어둔 채 모든 존재들의 청자로서 존재함으로써 공적 공간의 복수성을 실현하는 자리다.

<패터슨>은 이러한 점에서 윌리엄스의 시적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순간의 심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순간의 심상을 만들어내는 세계의 운동-이미지 전체에 주목하고 있다. <패터슨>은 기존의 언어 양식을 영화라는 운동적인 매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이라는 관점에서는 윌리엄스 시론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패터슨>은 시로 가득 찬 영화이며 그 자체로 한 편의 시가 되는 영화다. 이 영화는 공공의 삶 속에서 시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한다. 이 영화는 ‘시 쓰기’에 관한 영화로서 시 쓰기에 대한 성찰을 시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일찍이 플라톤은 시가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공공의 삶에 기여한 모범적인 인물들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교육적 기능을 수행할 때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반면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시의 무기능성을 주장했다. 

즉 그는 시의 치료기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강조했다. 문학 텍스트를 읽고 쓰면서 자기 서사를 구서해가는 문학치료의 활동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강요된 정상성으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패터슨>은 단순히 윌리엄스 시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다. 영화는 시의 창작이라는 대상의 분절 작용을 영화라는 운동-이미지 안에서 새로이 구성한다. 

사물의 지속을 직관하는 인물의 운동을 지극히 영화적인 형식미 안에서 시각화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 작품이다. 윌리엄스의 시가 사물의 순간 상태에 대한 시적 의미에서의 심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자무시의 <패터슨>은 이러한 심상이 만들어지는 감각-운동적 도식에 의한 과정 자체를 운동-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패터슨>에서의 시는 언어가 아닌 운동-이미지로 구현된 사물, 즉 이미지의 총체이다. 

영화는 시 창작 과정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과정, 즉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배치하는 방식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세계가 구성된 방식, 나아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영화가 이미지를 갖는 방식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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