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와 태고보우
상태바
홍주와 태고보우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8.02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성사람들은 홍주인(洪州人)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고, 홍주가 공주·충주·청주와 더불어 충청치역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다. 그런데 정작 어떤 이유에서 홍주가 목(牧)의 위치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홍주성역사관>이 개관되기 전까지는 일반인들 대상으로 홍성의 역사를 알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홍성군청 마당에 고려 공민왕(1358년)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안내표지판에는 이 나무가 고을에 액운을 미리 감지하여 밤새워 울면, 그 소리를 듣고 서둘러 예방했으며, 역대 목민관이 부임하면 나무아래 재물을 차리고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왜 공민왕 때 이 나무를 심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요즘에도 어떤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식수를 하듯이 공민왕 때 우리 홍성에 큰 경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따라 1356년 또는 1358년의 차이를 보이지만 고려 공민왕 5년 홍주출신의 태고보우가 왕사가 되었고, 왕사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왕사의 내향(內鄕)인 홍주를 목으로 승격시켰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후 홍주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600여 년 동안 충청지역의 중심이 되어왔다. 여기에 대해서『홍주대관』상권 279쪽에 실려 있다.

현재 홍성군청 홈페이지 고려시대 란에 ‘1371년(공민왕20년) 공민왕은 보우국사의 사망 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태어난 홍주를 목으로 승격시켰다’라고 간략히 적고 있다. 아마도 이 기록은 공민왕 17년 지주사로 낮추었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공민왕 20년) 보우가 다시 국사로 책봉됨에 따라 목으로 환원된 것에 대한 오기인 것 같다.

이처럼 홍주가 목으로 승격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고보우라는 탁월한 인물과 지방의 정치력이 그 이유라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홍주는 고려현종3년 이전까지는 신라 말 이후 운주라고 불렸으며, 운주 성주 긍준은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에 참여하고 일정한 지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긍준은 왕건의 12번째 비 홍복원부인의 아버지인 홍규(洪規)와 동일 인물로서 보우와 같은 홍주 홍씨이며, 이 세력들은 고려 내내 홍주지역의 호족으로 영향력을 유지했을 것이고, 그 힘이 태고보우의 왕사·국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지방자치제 이후 지역마다 지역발전에 걸 맞는 문화콘텐츠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역사를 마치 TV드라마와 사극이나 영화에서처럼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상상력을 더하여 만들어내는 예술 활동인 팩션 (Faction)’과 구분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홍성이 어떤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든지 간에 ‘홍주’라는 지명에 애착을 갖고, 홍성사람들이 ‘홍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태고보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홍성인의 저력은 바로 홍주라는 역사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홍주일보·홍주신문 칼럼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