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세한도’ 대표적인 문인화의 ‘정수’ 학예의 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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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세한도’ 대표적인 문인화의 ‘정수’ 학예의 총화
  • 글·창원 이영복(한국화가)
  • 승인 2022.11.1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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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다시 ‘세한도’를 들여다본다〈2〉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의 세도 정치에 도전했다가 쫓겨나 제주도로 귀양 간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메마른 둥치를 드러낸 세 그루 소나무에 둘러싸인 초라한 집 한 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도 변함없이 꼿꼿한 모습으로 작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불우한 처지에 놓인 김정희를 끝까지 지켜 주며 북경에서 귀한 책까지 구해 준 제자 이상적을 이 소나무들에 비유했다고 한다. 추사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혼탁한 정치판에서 물러난 김정희는 세상을 한탄하며 글씨와 그림에 깊숙이 몰두하게 된다. 몰락한 자신을 아무도 찾지 않아 가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로움과 분한 마음을 날이 추워진 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기대어 견디려고 하는 분투가 느껴진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품 서체로 알려진 추사체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펀집자 주>

세한도.

 이상적은 앞<1>에 적은 편지의 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이 되어 ‘세한도’를 가지고 연경에 가서 청나라 최고의 문사들과 같이한 자리에서 내보이고 문사들의 감동적인 송시(訟詩)와 찬문(贊文)을 받는다. 

현금에 이르러 사제지간의 도의(道義)가 땅에 떨어졌다고 탄식하는 세태에 처한 우리 모두에 ‘세한도’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감동을 주는 첫 번째 대목이다.

두 번째 감동을 주는 사유는 세한도의 격조 높은 예술성과 정신세계이다. ‘세한도’를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의아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이 과연 그 유명한 ‘세한도’인가 하고, 배경도 화려한 색채도 없는 황량하고, 한기마저 느껴지는 분위기 그림, 마치 대 빗자루로 쓱쓱 몇 번 쓸고 지나간 자국 같은 마당에 몇 그루의 나무와 상징적 허름한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어 쓸쓸함도 감도는 듯한 화면이다.

간혹 그림을 전공한 사람 중에도 ‘세한도’가 왜 감동을 주느냐?고 문의해 보면 선뜻 의견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차원 놓은 정신세계서 나온 작의(作意)와 앞서 밝힌 대로 그림으로서만 보고 해석해서는 부족한, 학예의 총화적 작품이기에, 보는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심안과 눈높이의 안목에 따라 각기 다르게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동양회화의 중심사상은 외형의 형태나 아름다움보다 물상 즉 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본질정신을 깊이 파악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중시한 점에서 추사의 정신세계에서 나온 ‘세한도’는 회화적 측면에서도 그 세계를 이미 통달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철저하게 계산된 안정된 구도와 구성… 나무 그림도 나무 종류를 구별 그 특징을 간명하게 표현된 필선은 한마디로 놀랍다. 필의 운용에 있어서도 노송과 젊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서로 다른 필선에서 추사가 의도한 심상과 일치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으며 조형적 감각은 물론 사물에 대한 관찰 인식도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한도’는 소나무와 잣나무, 상징적인 허름한 집 한 채가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으나 중심 주체는 노송이며, 이 노송은 바로 추사를 상징한다. 대지에 굳게 박힌 아름드리 노송은 추사 자신의 마음의 뜻을 실린 묵필선의 형상(形象)이다. 노목 몸체에서 한줄기는 곧장 하늘로 예리하게 치솟아 강한 의지와 기개를 나타내고 한줄기 곡선가지가 옆으로 뻗쳐진 끝자락에 솔잎이 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혹자는 “가지는 가냘프고 솔잎은 애처롭다”고 하였으나 내가 본 가지는 강한 선을 치기보다 더 어려운, 노련한 붓의 중봉필력이 요하는 가지의 선묘이며 솔잎은 애처롭다기보다는 희망의 솔잎으로 보인다.
 

세한도 그림 부분.

노송 옆에 곧게 서 있는 젊은 소나무는 제자 이상적으로 노송을 받쳐주고, 저 허름한 집을 지탱하게 하고 있다. 전형적 소나무 준법을 요약 활달한 운필에 의해 한층 젊고 싱싱한 소나무로 표출되었고 현대적 감각까지 느껴진다. 소나무 둥치와 수피를 조화롭게 표현하는 운필은 소나무 그림의 격을 좌우하는 요건으로 이 아름드리 몸통의 수피 묵필선은 묵의 농담을 비롯, 자유자재(自由自在) 통달(通達)하여 신묘(神妙)하게 변화 표현되었다.

치밀한 구도와 구성, 달관 된 운필(運筆)은 추사(秋史)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에서 이루어진 필선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드나 붓을 들기 전에 화면의 구상은 치밀했음을 알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라고 화제(畵題)를 우측 상단에 제발문(題跋文)은 왼쪽 아래로 자리를 잡아 넓은 공간 여백을 살려 주체인 나무와 집이 한눈에 시원스럽게 우선 들어오고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세한도(歲寒圖)’ 석자 글씨는 가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은 수직으로 너무 길어지지 않게 우선시상 옆에 완당을 따로 쓰고 가로로 새긴 작은 인장으로 함축성 있게 마무리를 했다.

여기에 노송에서 옆으로 한줄기 곡선으로 뻗어 나온 솔잎 달린 가지가 우선시상과 완당 낙관을 받쳐주고 있는 듯, 한 치만 더 나갔더라도 답답할 터 절묘하게 낙관과 어우러져 있다.

서화(書畵)에서 낙관인장(落款印章)은 화면의 한 획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여 때로는 전체 화면의 균형을 잡아주고 품격을 가늠하게도 하는 매우 중요한 분야이다.
 

세한도 화발(그림의 발문).

추사가 서화만 아니라 금석학의 대가인 것은 유명한 사실이지만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청나라 문사들도 추사에게 인장을 새겨달라는 부탁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좋은 인장만 보면 좋아하고 애장했다고 한다.

고문헌연구가 박철상 씨는 ‘세한도’에 관한 글 중에서 인장의 중요성을 ‘세한도’에 찍혀있는 인장을 예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한도에서 바람소리가 느껴진다. 이런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장이 뿜어내는 붉은 인주의 빛깔이 있다. 거칠고 메마른 붓 터치 속에서 인장은 ‘세한도’의 눈이 된다. 인장은 ‘세한도’의 꽃이다. ‘세한도’의 인장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모두 사방이 찍혀있다. ‘정희(正喜) 완당(阮堂) 추사(秋史) 장무상망(長毋相忘)’이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추사는 우리나라 인장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라고 적었다. 

세 번째 ‘세한도’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를 생각한다. 이상적은 스승께 쓴 편지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 이정응을 수행 연경에 가게 되어 ‘세한도’를 가지고 가서 다음해 정초에 청나라 문사 16인과 자리를 같이한 자리에서 ‘세한도’를 내보였다. 모여있던 문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하나같이 치하의 말이 이어지니 “시·서·화가 천하일품이거니와 더욱 뜻 깊은 것은 완당선생과 제자 이상적 두 사제지간의 아름답고 고매한 인간관계다. 외람되지만 그 그림의 말미에 발문을 쓰겠다”

모두가 감동하여 참여한 문사들은 장악진(章岳鎭)을 비롯 오찬(吳贊), 조진조(趙振祚), 반준기(潘遵祁), 반희보(潘希甫), 반증위(潘曾瑋), 풍계분(馮桂芬), 왕조(汪藻), 조무견(趙楙堅), 진경용(陳景庸), 요복증(姚福增), 오순소(吳淳韶), 주익지(周翼墀), 장수기(莊受祺), 장목(張穆), 장요손(張曜孫)으로 각기 수려하고 독특한 문체의 시(詩)와 찬문(贊文)을 옥판선지를 이어가며 쓰니 그 두루마리 길이 무려 스물두 자(10m)나 되었고 이상적은 귀국하는 길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었다. 1년이 지나 다시 ‘세한도’를 대하게 된 추사의 반갑고 기쁜 마음은 큰 위안이 되었고 자신도 감격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감동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완당 선생 초상. 허련(許鍊·1808~1893), 조선 19세기, 손창근(孫昌根).

추사의 ‘세한도’는 대표적인 문인화의 정수로 학예의 총화라고 칭송되고 있는 것은 이런 경로를 통해서 더욱 빛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세한도’가 돌아와서 다시 스승에게 보인 후에 물론 이상적이 소장하다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이 소장하게 되었고, 그 아들 김준학(金準學)이 물려받아 2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추사연구의 권위자였던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 직전인 1943년 10월 현해탄을 건너갔다.

이를 알게 된 서화가의 대가 진도 출신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선생이 일본 도쿄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석 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양도받아 다시 조국 땅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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