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초 꽃, 깽깽이 꽃, 수진달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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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초 꽃, 깽깽이 꽃, 수진달래 꽃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5.04 08: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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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시작을 알리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들이 올해도 다투어 피었다가 몰려온 비바람에 사체를 남겨 놓고 서둘러 철수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이들 속에 살며시 숨어, 봄을 찾아왔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꽃들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런 세월이 육십갑자의 한 사이클을 돌아 저만큼 달려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꽃에만 해당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삶도 그러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유효기간은 참으로 짧다.

이름 모를 꽃이 눈에 들어 온 것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이름을 불러주고서부터였다. 그동안 이름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보랏빛 깽깽이 꽃, 연분홍 앵초 꽃, 작은 폭포 옆에 살며시 얼굴을 내민 수달래 꽃. 다가가 얼굴을 살펴보니 봄날의 찬란함이 꽃잎에 물방울로 맺혀 있다. 산속 구름과 카메라를 든 내 모습도 물방울 속에 들어 있었다. 이름도 몰랐던 꽃들을 찍으러 산속까지 찾아왔으니 꽃이 더 예쁘게 보이지 않겠는가?

하모니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핀 야생화도 아름답지만 단일 품종 군락지도 장관이다. 제주도 뿐만아니라 곳곳에 피어난 유채꽃은 황금물결이다. 봄날 서산 ‘유기방 가옥’에는 수선화가 집 주변에 만발했다. 수만 그루의 수선화가 뒷산 언덕에서 미풍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양이 요람같은 봄의 달콤함을 즐긴다. 외국문학을 공부한 나에게 수선화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를 소환해 냈다. 그의 ‘수선화(Daffodils)’라는 시는 유명하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고향 호숫가 수선화를 보러 찾아간다. 

그런데, 유기방 가옥에 있는 수선화는 호수가 아니라 산속에 무리지어 피어 있는 수선화라니! 언덕배기에 노랗게 넘실대는 수선화 무리는 장관이었다. 나는 그 노란 수선화 물결에 동화되어 수선화 무리 중간에 갖다 놓은 의자에 앉아 잠시 수선화가 되어 고개를 끄덕인다. 워즈워스도 호숫가에 피어 있는 달밤의 수선화에 매료돼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고 수선화와 함께 춤을 추네”라고 읊지 않았던가. 나는 수선화 물결에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은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 아마 워즈워스도 멋진 시를 쓰기 위해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으리라.

워즈워스로 생각이 옳아 간 김에 지금의 체코 출신이며 독일어로 소설을 쓴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를 떠올려 본다. 그의 짧은 소설 ‘법 앞에서’는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주인공, 시골 사람은 어느 “법”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여기서 법은 이루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의 상징이며, 옳은 것에 대한 암호이자 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 법 앞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서 있고, 시골 사람은 그 법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법은 누구나 들어 갈 수 있지만, 문지기는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다. 시골 사람은 매일 그 문지기를 찾아가 오늘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지만 아직 안 된다는 대답만 듣는다. 시골 사람은 이제 늙어 눈앞이 잘 안보이고 희미한 불빛만 알아차릴 수 있게 됐지만, 법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예술가는 시골 노인처럼 먹고 사는데 별 도움 안 되는 미의 세계를 향해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이다. 누군가는 음악으로, 누군가는 붓을 들고, 누군가는 글로,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저 법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쉽게 들어가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문지기에 의해서 뿐 아니라, 아직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음을 스스로 안다. 요행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또 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어, 더 힘 센 문지기가 같은 대답을 한다고 한다. 

나도 카메라를 들고 저 성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수많은 사진을 찍어 문지기에게 보여 주며 저 성안을 볼 수 있는지를 물을 예정이다. 저 성안에는 들어갈수록 더 눈 밝은 문지기가 버티고 서 있다니 더 좋은 사진으로 문지기를 유혹해야 할 것이다. 아마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처럼 들어가지 못할는지 모른다. 

문지기의 거절이 계속된다하더라도 사진에 타인의 고통이 담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 ‘사진에 관하여’를 쓴 문화비평가 수전 손택은 사진에 폭력성이 담길 수 있음을 경고했다. 사자에게 잡혀먹는 가젤의 처절한 모습을 보면서 동물의 세계를 알기도 하지만 타자의 고통을 사진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발터 벤야민이 예측했듯 사진의 무한 복제와 모바일을 통한 대량 전송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사진의 ‘포토샵’과 편집이 손쉽게 이뤄질 수 있어 의도적으로 사진을 오남용할 수 있다. 내가 찍어 보내는 사진에도 타인의 고통과 오남용은 없는지 살펴 볼 일이다. 미래의 까막눈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지만, 자기가 찍어 보낸 사진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이름 모를 꽃들이 앞다퉈 봄기운에 벅찬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원추리도 표토로 떼지어 얼굴을 내밀었다.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초빙교수,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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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수 2023-05-04 11:12:48
피사체와 360도 회전해가면서 360가지 버전으로 끝장토론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자와 공감할 수 있는 나의 사진 한 장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상물이 불특정 다수에게 '느낌'을 주기위해서는 내용과 형식 또한 중요합니다. 부디 소재주의에 빠져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실패하는 가짜 '사진쟁이'를 닮지 읺으시길 기원합니다.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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