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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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엄마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6.08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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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능력은 죽음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잘 모르고 죽음을 맞이한다. 

필자의 엄마는 현재, 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고, 심장 판막 수술 후 중환자실에 계신다. 일반 병동에 계시면서 암 진단을 받기까지, 그리고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중단하기까지, 가족들이 간병을 교대하면서 엄마 곁을 지켰다. 

이와 같은 상황을 엄마뿐만 아니라 63년을 함께 살아온 아버지도 수용하실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모으려고 했다. 그런 과정에서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엄마를 휠체어에 앉힌 후 병원 스카이공원으로 모시고 나갔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람을 맞으면서 엄마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때 주변에 활짝 피어있는 한 송이 장미가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꽃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요청했다.

장미야 / 너는 내년에 봄이 오면 다시 예쁜 꽃으로 오겠지만 / 나는 다시 올지 모르겠다 / 너는 내년에 봄이 오면 예쁜 색으로 다시 오겠지만 / (우남)이는 다시 올는지 모르겠다 / 내가 기대해 보겠다 / 고맙구나. (2023년 5월 12일)

엄마는 장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후 흐느끼셨다. 나도 같이 울었다. 다시금 병실로 돌아온 엄마는 깊은 잠을 주무신 후, 힘겨웠던 자신의 삶의 보따리를 꺼내셨다. 자주 들었던 이야기지만 엄마가 평생 신고 걸었던 신발을 신고, 엄마가 바라본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면서 공감하고 경청하려고 했다. 엄마는 흐뭇해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육체의 피곤함은 쌓여갔고 강의 준비 등을 해야 하는 나에게 엄마의 걱정 섞인 말은 나의 콤플렉스를 자극했고, 급기야 단단하던 페르조나(persona, 가면)는 벗겨지고 말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짜증 섞인 말과 굳은 표정이 엄마에게 상처와 박탈감을 안겨줬다. 엄마는 나에게 실망하셨고, 표정은 굳어졌으며, 우리 사이에는 냉기가 흘렀다.

우리 집 가훈은 ‘온유하고, 화평하자’이다. ‘온유’는 성격이나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이고, ‘화평’은 형제간에 화목해야 한다고 뜻이 담겨 있다. 이 가훈도 엄마가 정한 것이고, 우리 오남매 가정에 액자를 만들어 제공해주셨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필자의 이 같은 태도가 엄마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서운하고 속상하셨을까 가늠할 수 있다.

애착이론을 중심으로 한 상담을 진행할 때, 상담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내담자가 가진 가치관이나 좌우명을 가면(persona)이라는 입장으로 보기 전에 내담자가 이러한 가치관이나 목표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과장되거나 빈약했던 애착사에 대한 과정을 공감해주는 것이다. 곧 내담자가 이러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질 수밖에 없는 애착환경에 대한 수용과 공감,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82세인 엄마의 유아기(0~1세), 초기 아동기(2~3세), 놀이기(4~6세), 학령기(7~12세)를 살펴보면, 외할아버지와 하나뿐인 외삼촌의 죽음이 있었다. 시대적 상황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울타리가 없는 가족체계 속에서 콤플렉스를 안고, 강하고 투쟁적인 페르조나를 쓴 채 청소년기와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살아오신 것이다. 삶을 전투적으로 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경험하면서 온유하고, 화평한 가정을 열망하였을 엄마의 삶이 더욱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시간이 되면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오롯이 엄마의 생각이 담겨 있고, 엄마를 살피는 거울이고, 일기장의 역할을 했다. 아마도 엄마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콤플렉스로 인한 페르조나를 벗고, 미워했던 것, 싫어했던 것 등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화해하고, 통합을 이루려는 활동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나는 언젠가 엄마의 그림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적이 있었는데, 엄마를 떠올리면서 그 사진들을 봤다. 그림 속에 엄마가 나에게 쓴 편지가 있었음을 이제야 자각했다. 무의식중에서도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실 엄마, 중환자실에서 나를 기다리실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꽃이 만발하게 피는 계절, 봄 / 우리 명옥 딸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감싸 주소서 / 하나님을 바라라 / 인내로 꾹 참고 걸어가면 / 좋은 일이 앞으로 많이 있으리라 / 엄마는 믿네. (2013년 4월 12일)

최명옥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 박사·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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