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묵죽화가에서 현대예술가로의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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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묵죽화가에서 현대예술가로의 변모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6.0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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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한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의 청년들이 예술가를 꿈꾸며 일본의 유명 도쿄미술대학에 유학을 시작했으며, 1930년대에는 데이코쿠(帝國)미술학교, 타이헤이요우(太平洋)미술학교, 분카(文化)학원, 니혼(日本)대학 등 상당수의 학생들이 진학했고, 식민지 조선에 귀국한 후로 조선 화단에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등 다양한 미술 경향을 전파했으며 이와 더불어 많은 미술인 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아울러 1921년 ‘서화협회전(1921~1935)’,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1922~1944)’라는 대규모 전람회가 조직됐다. ‘서화협회전’은 민족 미술인의 거취로써 조선 서화가들이 중심이 돼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후진교육’ 등을 표방하며 결성됐으나 여러 사정으로 1935년 폐지됐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 산하 관전(官展)으로써의 ‘조선미전’은 총독부의 대대적인 홍보, 수상 제도, 이왕가(李王家) 및 총독부 산하기관 및 개인 콜렉터들의 수상 작품 구매, 예술계 등단 등 다양한 이점을 앞세워 조선미술계의 중심 기구로 성장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무지였든 상당수의 예술가들은 조선미전이 추구하는 ‘조선 향토색론’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 ‘조선 향토색론’은 문화식민 사조로써 ‘일본이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해 조선을 미개, 향토, 자연, 과거형에 위치시키고, 일본을 문명, 도시, 과학, 미래형’에 위치시킴으로서 일본민족문화우월성을 조선인들에게 심으려는 책략이었다. 안타깝게도 1930년대 식민지 조선 화단에는 일본화 모방이 유행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동양사상과 즉흥성을 강조한 동양주의 미술론, 조선의 자연을 담은 향토예술론과 동양정신주의를 강조한 조선미술론, 민중의 삶을 강조한 조선미술론 등이 대두됐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이응노에게 더 넓은 안목으로 새로운 시대예술을 성찰케 했고, 당시 유행하던 일본 미술대학이 아닌 사설 강습소(가와바타 미술학교, 혼고회화연구소)나 개인화실(마츠바야시 게이게츠의 덴코 화숙)에서 서양화와 일본화를 배웠다. 대학이 아닌 일반 화숙과 연구소에 입문하게 된 연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사사하게 된 경험이 가장 영향력이 있으며, 당시 유행적 상황 또한 대학이 아닌 연구소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36년 마츠바야시 게이게츠 선생 문하(門下)에 입문한 일화도 해강 김규진 선생 문하에 입문했던 과정과도 닮은 곳이 많다. 일본 동경 소재 덴코 화숙을 찾아간 이응노는 게이게츠 선생을 뵙기를 청했지만 선생은 만나주지 않았다. 두 번째로 찾아간 날은 운 좋게도 선생이 손님을 배웅하러 나오는 순간 대문 앞에서 뵙게 됐다. 

이응노는 호기롭게 자신의 대나무 작품을 선생께 펼쳐 보이며 작가로서의 내력을 어필했고, 선생은 ‘제자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대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면서 이응노를 맞이했다. 이후 한 달에 두세 번씩 찾아뵈며 사사하게 됐으며, 특히 게이게츠 선생은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생’을 충실하게 연습하라고 강조했고, 실제로 이응노는 집요하게 풍경, 인물, 정물 등 사생에 몰입하며 수많은 연습작품을 남겼다. 

이후 이응노는 10여 년간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창작활동을 했고, 옛 서울의 한강 풍경, 궁궐, 교회, 채석장을 비롯해 고향 홍성, 부여, 공주, 태안 등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사생 연습을 했다. 이때의 그림은 주로 연필과 목탄을 이용했고, 사실적 표현과 기하학적 원근법에 부감법과 파노라마적 시선이 융합한 동서양의 산수-풍경 스케치였다.

서양식 풍경화의 원근법과 선으로 대상을 그리고 면을 색으로 채우는 방식은 동양회화의 붓 선이 곧 형태를 표현하는 방식과 상하좌우로 끝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적 시선과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법이 특징인 산수화와는 사뭇 달랐다. 이 시기, 동양과 서양의 많은 화가들은 동서양의 화풍을 융합시키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으며, 이응노 또한 서양의 스케치 풍에 동양화의 필묵 맛이 결합한 신남화 양식의 풍경화를 창작하며 전통묵죽화가에서 현대예술가로 변모하며 조선 화단에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하게 다져나간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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