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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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홀로서기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8.03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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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상실을 경험한다. 상실은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부터 분리를 야기한다. 모든 상실이 다 슬프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은 모든 상실 가운데 가장 슬픈 일이다.

올해 88세인 아버지는 시골에서 혼자 생활하신다. 출근할 때 전화를 드리면 이른 새벽부터 엄마 산소(山所)가 있는 밭에서 강낭콩, 땅콩, 양파 등을 가꾸고 계신다. 나는 “아버지, 오늘은 엄마가 뭐라고 하셔요?”라고 물으면, “아무 말도 없다”고 하시면서 속상해하신다. 그리고 “죽음은 참 무섭고, 무정한 것이다.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니까. 이렇게 쉽게 갈 줄 몰랐다”며 슬퍼하신다. “아버지, 그러면 엄마가 아파서라도 옆에 계셨으면 좋았을까요?”라고 묻자 “그렇지. 아파서라도 좀 더 살았어야지. 몇 년 동안 아프면 정이 떨어지기도 한다지만 그래도 살았어야지.(생략) 엄마가 병원에서 나에게 세 번 ‘미안해요’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자신이 먼저 가는 것이 미안하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애도과정을 상실연대표로 작성해봤다. 아버지는 8세 때 증조부(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죽음을 봤다. 15세 때는 조부모님(아버지의 부모)이 몇 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셨고, 17세 때는 고조부(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리고 결혼 전 외삼촌(엄마의 오빠)과 외할아버지(장인어른)의 죽음을 봤고, 40~50대에는 집안 어른들을 떠나보내셨다. 그리고 74세경 외할머니(장모)의 죽음을, 이후 큰아버지(형)와 고모(누나), 이모(엄마의 언니)와 이모부가 돌아가신 것을 봤다. 그리고 88세 때 63년을 같이 생활한 아내(엄마)와 49일째 이별하고 상실감 속에서 애도 과정을 밟고 계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중요한 사람을 상실한 이후 4단계의 애도 과정을 거친다고 존 보울비(John Bowlby)는 말한다. 이 과정은 순차적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 단계로 되돌아갔다가 앞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각 단계에서 소요되는 시간은 개인과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 

1단계는 충격과 무감각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경험하는 감정의 폭풍을 피하기 위해 감정 전체를 차단하는 무감각 상태에 빠진다. 

2단계는 부인(否認)과 철회(撤回)이다. 내면으로부터 밀려오는 상처, 죄책감 등을 부인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철회하고자 신체적, 심리적 반응(지나친 수면, 식욕 감퇴, 분노 등)이 나타난다. 

3단계는 수용과 고통이다. 이 단계는 회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곧 상실의 사건이 현실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자신 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4단계는 순응과 회복이다. “왜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라고 던지던 질문이 “내가 이 끔찍한 일을 거치는 동안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질문으로 변하면 애도의 과정이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사별 전 엄마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들만 생각하시고, 미안해하시는 아버지. 함께 생활했던 주거 공간 곳곳에서 엄마의 흔적을 느끼시는 아버지. 그리움과 외로움 등의 복합 감정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더 자주 논밭으로 나아가시는 아버지. 땀을 뻘뻘 흘리신 후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위해 밥을 차리시는 아버지. 긴 밤을 지새운 후 새벽에 일어나 또다시 밥상을 차리시는 아버지. 엄마 사진을 보면서 말을 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고 흐느끼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에 계속 맴돌고 있다. 

애도 상담이론 중 지속적 결속이론(Contin uing Bonds Theory)에서는 사별 대상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애써 잊으려 하기보단 더 간직하면서 삶에서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라고 강조한다. 

또한 알렌 울펠트(Allan D. Wolfelt)는 애도 상담을 ‘치료(Treatment) 과정’이 아닌 ‘동반(Companion)’으로 얘기한다. 울펠트가 말하는 동반하기의 11가지 원리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영혼의 광야에 그대로 들어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사별 애도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에 함께 머물면서 판단하거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기다리며 함께 하는 것이 위로를 위한 돌봄과 상담의 핵심 원리라고 했다. 

현대인들은 혼란의 문지방에 있는 사별 가족들을 속히 건져내려고 한다. 참아라, 잊어라, 속히 벗어나라, 힘내라 등 해결을 위한 말로 요구한다. 나도 기존에는 그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와의 사별, 그리고 아버지의 상실을 바라보면서 죽음과 상실, 애도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바뀌었다.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와 같이 엄마와 함께 했던 다양한 추억을 회상하고, 함께 슬픔을 공감하며, 함께 동반하기를 실천해보려고 한다.

최명옥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 박사·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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