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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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를 읽고
  • 장정우 <공익법률센터 농본 활동가>
  • 승인 2023.11.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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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에 늦을까 가속페달을 밟고, 누군가와 대화하며 카톡으로 다른 업무를 보고, 야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간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 년 내내 언제나 바쁘다. 그렇게 빡빡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한국 사회는 한가하거나 할 일이 없는 것보다 바쁜 것이 낫다며 더욱 속도를 높인다.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는 그런 의미에서 저항적이다. 책은 지금 이곳의 일들도 다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1990년대를 돌아보자고 한다. 그렇다면 돌아보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 책을 쓴 저자 윤여일은 1990년대가 ‘잡지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문학, 사상, 문화, 세대, 디지털, 지식인, 진보, 국가, 통제, 여성, 생태, 위기, 대중 등 13가지 키워드로 잡지들을 분류해 1990년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약 1000종 이상의 잡지가 있었던 1990년대와 정보의 홍수라고 하는 지금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윤여일/돌베개/1만 9000원.
윤여일/돌베개/1만 9000원.

저자는 손쉽게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 우리가 기대했던 바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생산적 논의의 양상과는 반대로 집단적 동조화 현상, 의견의 양극단화 현상이 나타나고, 자신과 가까운 사고방식을 찾거나 그런 류의 사이트만을 열람해 시야는 오히려 좁아지며, 인터넷상에서 이슈가 될 만한 소재는 나날이 공급되어 어제 들춰진 소재는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 오늘 새로운 소재들에 밀려나며 이에 따라 경중이 아닌 신선도에 따라 정보의 가치가 매겨지고, 단멸하고 격화되는 사고가 횡행한다”고 진단한다(315쪽). 그리하여 지금의 한국 사회가 온라인상에서 공론화가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게토화되고 있다고 작가는 염려한다.

반면 잡지(雜誌)는 그 이름이 내포한 의미대로 뒤섞임(雜)의 기록(誌)이다. 잡지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 혹은 특정 기간 일어났던 사건들의 관계성과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의 교차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잡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론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에 더해 잡지가 발행되는 주기에 주목한다. 최근의 뉴스 혹은 일간신문과 주간신문 등과는 달리 월간지나 계간지는 그 발행주기 만큼 사건에 대한 해석의 호흡이 길기 마련이다. 즉 잡지를 통해 우리는 넓고 깊게 사고하는 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노래가 점점 짧아지고, 유튜브 영상을 1.5배속, 2배속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영상 자체의 길이도 짧아져 쇼츠(Shorts)라는 영역마저 생겨났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나도 매일 할 일에 치여 종종걸음을 친다. 어떤 날은 회의 자리에 가도 논의 안건에 대해 미리 숙지하지 못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무기력하게 앉아있기도 한다. 바쁘게 할 일이 있다는 것, 오만 가지 일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곤 한다.

지난 11월 2일 후쿠시마 오염수 3차 방류가 시작됐다. 하지만 첫 방류를 시작했던 8월 24일로부터 불과 2달여 지났을 뿐이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벌써 오염수 문제는 한참 전에 논의가 끝난 사안인 것 같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불과 1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사이 벌어진 무수한 사건·사고들, 아니 당장 우리가 자는 사이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일에 밀려 ‘무려 1년 전’의 일이 돼버렸다.
너무나 중요하고 무서운 사건들이 놀라울 만큼 무덤덤하고 잠깐 사이에 우리의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며, 이 책의 내용 자체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이해할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지난날의 잡지를 뒤진 저자의 행동 자체에 나는 더 시선이 갔다.

지난 8월에 열린 2023 DMZ 평화문화축전에는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살해당한 팔레스타인 소녀와 그 사건을 좇는 여성을 그린 소설 《사소한 일》의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가 참석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세계가 계속해서 무너지는 동안 홀로 앉아 글을 쓰는 행위의 고립감과 대부분의 경우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무언가를 바꾸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경향신문, 2023.10.25.). 그러면서도 쉬블리는 자신이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결국 “단어와 글은 아무리 작아도 세상에 흔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담담히 말한다.

매일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그중에 일부는 가벼운 안줏거리일 수 있고 또 어떤 일은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일일 수 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우리가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않고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것마저 아무런 의미 없는 가십처럼 지나쳐 보내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속도를 늦추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찬찬히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언가에 대해 흔적을 남기고, 남겨진 기록을 나눠 읽으며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복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잡지의 시대가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잡지를 소개하고 싶다. 2021년 181호를 발행하고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녹색평론》이 계간지가 돼 2023년 182호로 다시 돌아왔다. 《녹색평론》은 ‘인간다운, 지속 가능한 공생적 문화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의 재건’을 이야기하는 잡지이다. 지금도 정신없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러나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는 이들에게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와 《녹색평론》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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