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용필동법론(書畫用筆同法論), 서법과 화법의 융합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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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용필동법론(書畫用筆同法論), 서법과 화법의 융합을 이루다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2.1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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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는 프랑스를 기반으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전세계적으로 유명작가가 됐지만, 조국인 대한민국과는 여러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지면서 그의 삶과 예술세계 중 굴곡진 삶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1999년 한 해 동안 고암 이응노 화백의 10주기 추모전이 전국 주요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며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집중 조명하게 됐고,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2000~2005) 개관과 고암미술연구소가 설립되며 한국미술사에서의 이응노 화백의 위상을 재고하는 기획전과 학술연구가 시작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2007년 대전이응노미술관, 2011년 고암이응노기념관이 설립되며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 등을 온전하게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연구사업들이 진행됐고, 30여 년간의 연구업적들이 쌓이게 됐다. 

갑진년 새해, 고암 이응노 화백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며 올해의 칼럼에서는 그간 축적된 이응노 화백에 대한 작가론 연구와 작품론 연구, 한국미술비평사 등을 정리해 소개함으로써 고암 이응노 화백의 시기별 예술작품의 특징과 예술세계의 변천과정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 
 

그림1)해강 김규진 <묵죽도>, 1900년대 초반, 비단에 수묵, 123.5x35cm. 그림2)죽사 이응노 <묵죽도>, 1920년대 초반 추정, 한지 위에 수묵, 135x35cm.  그림3)죽사 이응노 <묵죽도>, 1930년대, 한지 위에 수묵, 135x35cm.소장=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그림1)해강 김규진 <묵죽도>, 1900년대 초반, 비단에 수묵, 123.5x35cm. 그림2)죽사 이응노 <묵죽도>, 1920년대 초반 추정, 한지 위에 수묵, 135x35cm.  그림3)죽사 이응노 <묵죽도>, 1930년대, 한지 위에 수묵, 135x35cm.소장=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예술는 크게 1920년대 수묵전통의 묵죽화, 1930년대 서양화풍의 사실주의 수묵화, 1940~50년대 자연사물의 반추상적 사의주의, 1960~70년대 자연사물과 문자를 결합한 사의적 추상, 1980년대 수묵의 현대 서예 추상 등 다섯의 대범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 대범주 안에 작은 범주의 다양한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칼럼에서는 이응노 화백의 정신적 근간이자 출발점이자, 대순환을 거쳐 끝내 예술가적 회귀로 이끌었던 1920년대의 ‘묵죽화’를 중심으로 전반적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응노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길을 선택하던 1920년대 식민지 조선화단에는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문치정책의 수단으로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를 창설했고, 1부 동양화부, 2부 서양화 및 조각부, 3부 서예 및 사군자부 등 3부로 구분했다. 이 선전의 주요 목적은 식민지 조선에 이주해 활동하는 일본인 예술인들의 등용문을 위함이었고, 그 일부분으로서 조선인 예술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는데 현실적으로 조선인 예술가들이 폭넓은 활동과 장래성을 위해서는 선전의 입선이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작용했다. 이후 1944년까지 23회를 개최하며 한국 근대화단의 자율적 성장과 미술양식의 다양성을 크게 위축시켰으나 근대 화단의 작가 활동 기반조성과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긍·부정의 결과를 낳았다.

조선 근대의 사군자화는 19세기 문인화 부흥의 영향으로 화단의 주요 화제(畫題)로 인정받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추사 김정희의 서법(書法)의 예서(禮書)를 근본으로 한 묵란법의 전통이 석파 이하응(흥선대군)으로 전수됐고, 이은 김응원, 옥경 윤영기, 해강 김규진,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등으로 이어졌다.  제자들 중 해강 김규진은 묵죽화로 명성이 높았으며 문화에서 배출한 걸출한 묵죽화가들 중 금강산인(金剛山人), 김진우(金鎭宇), 어문(魚門), 황철(黃鐵) 등이 있었다. 이응노는 해강 김규진 문하에 입문해 다수의 제자들처럼 해강묵죽법의 전통을 이어갔다. 해강 김규진은 굵은 통죽(筒竹)을 대나무 상부화 하부를 제외한 중앙과 하단 부분만을 그리는 상하절단식의 묵죽화 양식을 구축했다. 

해강 김규진 作 <묵죽도>(그림1)은 묵죽화 그림의 전면에 농묵(짙은 먹색)의 굵은 대나무 한 줄기를 배치하고, 뒤편으로 담묵(엷은 먹색)으로 작은 두 줄기의 대나무를 배치한다. 두 그루의 굵은 대나무는 수직구조와 사선구조로 이뤄져 있으며, 하단의 아랫마디 부분에서부터 중앙부분까지 가는 줄기가 좌우로 균형을 맞춰가며 뻗쳐있고, 화면 중앙에 이르러 왼편에서부터 세차게 부는 바람을 타면서 허공에 흩날리는 짧은 대나무 잎의 무리를 표현했다.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수학한 이응노의 초기 작품은 분명 스승의 화풍을 근간으로 출발한다. 

1920년대 초반 제작한 죽사 이응노의 <묵죽도>(그림 2)에서 보여지듯 스승의 통죽과는 달리 굵기가 가는 신죽(新竹)으로 표현했으나, 중앙부분의 무리지어 흩날리는 잎의 표현 방식은 스승의 전례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기나긴 무명시절과 고난한 작품활동을 지속하던 중 ‘바람에 흩날리던 대나무 숲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1930년대 초 이응노는 자신의 독자적 묵죽화 양식을 구축했다. 

고암 이응노의 1930년대 초반의 <묵죽화>(그림3)  작품은 기존의 상부와 하부를 배제한 상부절단식을 유지하면서 가는 선으로 마디를 둥글게 그리는 화절법(畵節法)과 상하가 격렬하게 어긋나 있는 굵은 마디를 반복적으로 이어가며 전체 죽간(竹竿)을 형성한다. 가늘고 엷으면서도 미묘한 농담으로 두터움을 얻은 두 그루의 대나무와 가는 줄기를 통해 긴장감이 넘치는 회화적 공간을 구성하였다. 이 대나무 줄기에 크고 작은 잎들을 초기 화풍의 제비꼬리나 물고기 꼬리처럼 가늘고 힘차게 삐치지 않게 처리했고, 다소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감각의 뭉툭하면서도 활달한 잎으로 처리했다. 이응노의 새로운 묵죽화풍은 기세(氣勢)와 필세(筆勢)가 더해진 서예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풍을 이끌어가는 근원적 에너지로 작동했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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