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사총, 의병의 무덤? 동학농민군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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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의병의 무덤? 동학농민군의 무덤?
  • 한기원 기자
  • 승인 2024.07.1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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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의병의 무덤? 동학농민군의 무덤? 〈1〉
1950년대 홍주의사총.
1950년대 홍주의사총.

 

“1949년 900여 구의 유골이 발견되기까지 40~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간동의 동학농민군 처형장에서 발견된 유골은 80여 구의 의병 유골을 포함하더라도 많은 숫자라는 점에서 수백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들의 유골일 것이라는 주장”

동학농민혁명 시 홍주는 동학농민군의 희생자가 많았던 것으로 1938년 간행된 ‘동학사’ 등에 기록하고 있다. 홍주에서의 희생자는 홍주성 전투로 비롯된 것이다. 홍주성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있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던 중 1949년 4월 5일 박주철 홍성군수와 박헌교 홍성경찰서장이 직원들을 인솔해 현재의 홍주의사총이 있는 홍성 대교리 동쪽 기슭에서 식목 행사를 하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이 발견되면서 진위논쟁에 휩싸이게 됐다. 

그러나 그 당시 발견된 유골은 ‘병오순란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難義兵將士公墓碑)’라는 묘비를 세우면서 ‘1906년 병오의병의 무덤’인 ‘홍주의사총’으로 알려지게 됐다.

홍주의사총의 공식명칭은 ‘홍성 홍주의사총’으로 사적 제431호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홍주의사총 일대에서 발견된 유골이 900여 구에 이른다’고 해서 처음에는 ‘구백(900)의총’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구백의사총’이라 불리게 된 연유인데, 유골 발견 당시 이를 증언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연로한 노인들이 1905년 홍주의병전쟁 당시 전사한 의병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홍주의사총이 ‘의병의 무덤’이라는 점에 대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홍주성 전투와 1905년의 의병 전쟁 당시의 홍주성 전투를 비교하면서 ‘홍주의사총의 진위규명을 위한 문제 제기’ 등을 통해 의문점을 제기하면서 ‘동학농민군의 무덤’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여기서 핵심은 발견된 유골이 900여 구에 이른다는 점이다. 발견된 유골 900여 구를 놓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홍주성 전투에서의 희생자 숫자와 1905년 홍주의병전쟁 당시 전사한 의병의 숫자와의 차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의병의 희생자 수가 83명만이 매장됐고, 동학농민군은 최소 200명에서 700명, 최대 3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월계천과 홍성천 주변에서 목숨을 잃고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서산, 태안을 비롯해 당진, 아산, 덕산 등지에서 참여한 관계로 홍주와는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신은 그대로 벼려질 수밖에 없었다. 

홍주의병전쟁으로 희생된 83명이 홍주군수의 지시로 잘 ‘매장’한 반면, 수천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상황으로는 참형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홍주의사총이 의병의 무덤이냐? 동학농민군의 무덤이냐?’의 논쟁의 핵심은 1949년 900여 구의 유골이 발견되기까지 40~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간동의 동학농민군 처형장에서 발견된 유골은 80여 구의 의병의 유골을 포함하더라도 많은 숫자라는 점에서 수백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들의 유골일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한다는 문제 제기다. 

당시 의병전쟁 희생자는 대부분 연고자를 찾거나 신원이 밝혀진 반면, 동학농민군들의 희생자에 대한 현황은 추정만 할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사료발굴과 연구가 필요하고, 이에 따라 구체적이고 명확한 규명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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