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은 조각 끌이 되고, 화선지는 나무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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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은 조각 끌이 되고, 화선지는 나무가 되고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8.03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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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예술세계는 서화를 근간으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함으로써 예술 장르의 다양성의 추구할 수 있었고 지속적인 실험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응노는 1950년대 초반 자신이 추구하던 서화미학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장르의 다양성과 실험성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 이응노는 동아일보에 ‘경주 기행-신라예술의 기백’이란 제하의 기행문을 기고했는데, 경주지역 곳곳의 문화재들을 일일이 답사하며 그 감동과 열렬한 찬사를 가감 없이 고백하고 있었다. 

특히 석굴암의 금강역사상, 보살상, 본존불 등의 조각물의 조형성과 기법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붓대를 꺾어 버리고 차라리 사경에 파묻히고 싶은 충동과 미약한 나의 발자취에 거친 물결이 몰려오는 것만 같다”는 표현 속에서 전통 조각의 표현기법과 조형성을 통해 자신의 회화미학의 고민 지점을 해결하고 싶은 열정이 엿보인다.
 

이응노, 토템, 1964년, 나무, 97x16x15cm, 2ea./ 이응노, 군상, 1965, 종이찰흙, 33x17x13cm. 개인소장(2017년 브론즈 복제).
이응노, 토템, 1964년, 나무, 97x16x15cm, 2ea./ 이응노, 군상, 1965, 종이찰흙, 33x17x13cm. 개인소장(2017년 브론즈 복제).

조각장르에 대한 이응노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으로 제작된 시점은 1964년을 기점으로 볼 수 있는데, 이 해에 조금 특별한 인연이 펼쳐지며 이응노의 조각에 대한 관심을 표면으로 드러내게 하여 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한국의 여류 조각가 김윤신(함경남도 원산 출생, 1935~)이 1950년대 후반 이응노가 재직했던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64년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며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응노와 교류를 하게 된다. 

김윤신 작가는 최근 ‘2024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작가로 선정된 90세의 여류 조각가로 지난해와 올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다. 

김윤신 작가는 최근 한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1964년 파리로 이주 후 고암 이응노 선생님을 찾아뵀는데, 이응노 선생님께서 ‘내가 조각을 하고 싶은데, 네가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셔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뵈며 나무 조각 방식을 알려드렸다”고 회고했다. 

30여 년 차이가 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면서도, 새로운 조형기법을 알기 위해 스스럼없이 제자에게 물어 아는 점도 훌륭하고, 화업 30여 년을 넘어서서 작가로서 작품세계에 대해 소통한다는 점도 아름다운 사제동행 같다. 

이응노 화백과 김윤신 작가의 교류는 김윤신 작가의 여러 사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응노의 수많은 작품 중 조각 작품은 극소수이지만, 작품의 시대적 특징과 변화 과정을 살펴본다면 1964년경부터 실험적 조각 작품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응노는 1964년 폴 파케티 화랑에서 나무로 제작한 작품 3점-<얼굴>(1964), <토템> 2점-을 전시했는데, <얼굴>은 한국의 전통 가면인 하회탈 같은 형상이 3단 구조로 기둥처럼 이뤄진 작품이다. 

작품 예시로서, 작품 <토템>(1964년)은 길이 1M 남짓의 지름 20cm의 통나무를 자귀로 거칠게 찍어내고 나무 끌로 깎아 내었으며, 하단 부분에서 상단 부분까지 작은 원형구조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데 나무기둥(토템 폴)의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심메트리 구조를 이루며 원시적이고 추상적인 강렬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거칠게 찍은 자귀자국이나 끌 자국을 남겨놓았고, 나무가 지닌 나뭇결과 단면의 구조, 나무의 색감과 질감, 울퉁불퉁하고 기괴한 추상적 형태가 특징이다. 작품 <군상>(1965년)은 종이찰흙으로 빚은 여러 사람이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구조의 형상인데, 사람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얼굴은 구멍이 뚫려 있고, 몸의 형태는 가느다란 선으로 얽혀져 있는 2단 구조의 작품이다. 복잡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간결하고 강렬한 조형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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